시온산 성지

시온산

테오필로 2007. 4. 26. 18:26
 

시온산


                                        (시편 122,1-9 : 순례자의 노래) 

   야훼 집에 가자 할 때, 나는 몹시도 기뻤다. 

   우리는 벌써 왔다, 예루살렘아,

   네 문 앞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예루살렘아, 과연 수도답게 잘도 지어졌구나.

   모든 것이 한몸같이 잘도 짜여졌구나. 

   그 지파들이, 야훼의 지파들이

   이스라엘의 법도에 따라 야훼 이름 기리러 그리로 올라가는구나. 

   재판석이 거기에 있고 다윗 가문이 앉을 자리 또한 거기에 있구나.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화의 소리 외쳐라. "네 집안에 평화!" 

   "네 성안에 평화!" "궁궐 안에 평화!" 

   내 겨레, 내 벗들을 나 사랑하거늘 "너에게 평화!" 외치게 해다오. 

   우리 하느님 야훼의 집을 나 사랑하거늘, 너에게 복이 있으라.

    



  예루살렘의 남서쪽에 있는 해발 765m의 시온산은 그리스도교뿐만 아니라 유대교, 이슬람교도들에게도 모두 중요한 곳으로 “거룩한 시온”(하기아 시온)이라고 부른다. 특별히 그리스도교인 들에게는 바로 이곳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최후만찬을 행하셨으며 부활하신 후에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두 번이나 발현하셨으며, 승천하신 후에는 약속하신 데로 성령을 보내주심으로(성령강림) 교회의 발상지가 된 곳이기에 아주 소중한 성지이다. 또한 성령강림 때에 성모님은 사도들과 함께 이곳에 계셨으며(사도 1,12-14) 이곳에서 사시다가 돌아가셨다고 교회 전승은 전한다. 아마도 이곳이 그리스도교 최초의 예루살렘 공의회의 장소(사도 15,1-35) 였을 것이며, 예수님 “부활 성당”이 335년에 지어지기 전까지 예루살렘의 유대계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중심지였으며 주교좌가 있었던 곳이다. 주교좌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하여 “예수님 부활 성전”이 지어지자 부활 성전으로 옮겨졌다.

  이곳 시온산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초세기부터 보관하고 있었던 예수님께서 사형 선고 후 병사들에게 돌기둥에 묶여 채찍질을 당했던 그 돌기둥은 주교좌가 “부활성당”으로 옮겨지면서 함께 옮겨졌고, 현재는 무덤성당(예수님 부활 성당은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탈환한 후 부서진 성당을 복구하고 난 다음부터 “무덤성당”이라는 명칭으로 부르기 시작했으며 동일한 성당의 다른 이름이다.) 내 “발현경당” 제대 오른쪽에 있다.


  시온산은 원래 예루살렘 남동부에 위치한 언덕(현 다윗의 도성)을 가리키는 이름 이었으나, 다윗이 계약의 궤를 이곳에 옮겨서 제단을 쌓은 이래 이 언덕은 ‘야훼의 거룩한 산’이라 불리게 되었다(2사무 6:12-18, 시편 2:6). 그 후 솔로몬이 모리야산에 성전을 세웠기 때문에 시온이라는 명칭은 모리야산의 성전까지도 포함하는 이름이 되었으며(이사 18,7; 미가 4,7), 상징적으로는 ‘거룩한 산’, ‘예루살렘 도시 전체’(시편 48,2; 69,35; 이사 2,3; 60,14)를 의미하면서 ‘야훼의 도시’로서의 예루살렘이라는 점을 강조할 때 사용 되었다.

‘시온의 딸’이라는 성서의 표현법은 예루살렘의 시민을 가리키는 말이다. 또한 시온은 기다리는 유대의 신정(神政)을 의미하기도 하며 (시편, 126,1; 이사 34,8), 신약성서에서는 하늘에 있는 신의 도시를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히브 12,22; 묵시 14,1). 


  예루살렘 성 안에서 남서쪽에 있는 시온 성문을 지나면 시온산 지역을 만나게 되는데, 신약 시대에는 성벽 안에 있었지만 오스만 터키 제국의 슐레이만 2세가 재건하면서(1532-1539년) 성벽 밖에 위치하게 되었다. 현재 시온산 지역에는 최후의 만찬 성당과 마리아 영면 기념 성전, 갈리깐뚜( 닭울음 성전-베드로 회개 기념 성전) 그리고 프란치스칸, 그리스 정교회, 아르메니안 정교회의 공동묘지가 위치하고 있다.


예루살렘아, 주님을 기려라. 시온아, 네 하느님을 찬양하여라.(시편 147,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