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도보순례(Israel traking)

마지막 (2008.10.26-30)- 엘랏까지(3)

테오필로 2009. 1. 7. 01:11

 

네겝(Negev)은 이스라엘 남부에 있는 건조지역이다. 네겝은 요르단 서쪽 팔레스타인의 거의 절반에 이르는 지역으로 1949-67년에는 이스라엘 국토의 60% 가량을 차지하기도 했다. 네겝은 '건조하다' 또는 '닦아서 말리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동사 어근 n-g-b에서 생겨났다. 이 지역은 남쪽 끝부분을 정점으로 세모꼴을 이루고 있으며 서쪽으로 이집트의 시나이 반도, 동쪽으로 요르단과 맞닿아 있다. 북서쪽으로는 해안평야, 북동쪽으로는 유대 광야 등이 이어져 있어 북쪽 경계는 뚜렷하지 않다. 따라서 대부분의 경우 임의로 정한 북위 30°25´을 북쪽 경계로 삼는다. 이 경계선을 기준으로 한 네겝 지역의 면적은 약 12,173㎢에 이른다.

 

지질구조상 네겝은 북동-남서 방향으로 뻗은 습곡지대 가운데 한 부분으로, 단층을 이룬 곳이 많고 석회암과 백악(白堊)이 아주 풍부하다. 높은 절벽으로 둘러싸인 크고 길쭉한 분화구들이 독특한 지형을 이루는데, 이는 배사구조의 상부 습곡층이 침식되면서 수평방향으로 압력을 받아 형성된 분화구이다. 이 가운데 가장 큰 미츠페 라몬 분화구는 길이 37km, 폭 8km에 이르며 큰분화구는 길이 14.5km, 폭 6.4km 정도이다. 이들 분화구 밑바닥에서는 지질학적으로 절벽이나 주변 고원보다 훨씬 오래전에 생성된 백악·이회토(泥灰土)·석고층이 발견된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주님, 저희의 운명을 네겝 땅 시냇물처럼 되돌리소서. 눈물로 씨 뿌리던 이들 환호하며 거두리라.”(시편 126,4-5)라는 구절에서 이곳이 역사시대 초기부터 반건조지대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네겝이 사막지대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해발고도 250m인 브에르 세바 지역은 연강우량이 200~300㎜를 오르내리기도 하며 강우량이 300㎜만 되면 관개시설 없이도 곡물농사를 지을 수 있다. 강우량은 남쪽으로 갈수록 줄어 중앙에 있는 네겝 고원(해발 250~1,035m)에서는 75~100㎜으로 떨어지고 남쪽 끝의 엘랏에서는 비가 거의 오지 않는다. 강우량은 곳에 따라 해마다 크게 달라지며 겨울 우기에는 갑작스런 홍수가 나는 일도 많다. 울퉁불퉁한 지면은 대부분 우기에 형성되는 와디(계곡)의 물줄기 때문에 심하게 팬 것이다.

 

이 지역에는 선사시대 및 초기 역사시대 유물이 많이 남아 있다. 후기 석기시대(BC 7000경)의 돌화살촉과 청동기시대(BC 4000~1400경)에 썼던 도구가 네겝 고원 중앙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성서시대에는 목축이 행해졌으나 셈족인 나바타이아인들이 오늘날의 요르단 지역에 모여들어 계단식 토지를 만들고 겨울에 내린 비를 모아두는 기술을 발전시키면서 농업이 번성하게 되었다. 로마 제국시대에는 중요한 곡창지대였으나 7세기경 아랍인이 팔레스타인을 정복한 뒤 황폐해져 그 뒤 1,200년 이상 유목민인 베두인족 일부만이 여기에 살았다.

 

1943년 3개의 키부츠(집단농장)가 만들어지면서 다시 농업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첫 번째 대규모 관개사업이 시작되었고 다른 키부츠들이 계속 세워졌다. 1948년 이스라엘이 세워진 후 국토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네겝 지역개발의 중요성을 깨달은 정부가 수로계획을 세워 수송관 및 수도시설을 통해 북부와 중부에서 네겝 북서부로 물을 댄 결과 이곳은 16만ha가 넘는 기름진 황토지대로 변했다. 관개용수와 1년 내내 내리쬐는 햇빛으로 곡물·사료·과일·채소를 비롯한 질 좋은 농작물을 생산하며 이모작도 많이 하고 있다.

 

광물자원개발도 농업에 못지않은 발전을 이루었다. 사해 남쪽 끝에 있는 세돔에서는 칼륨·브롬·마그네슘이, 팀나에서는 구리가 난다. 볼 클레이(2차 점토)와 유리를 만드는 모래가 많아 요업과 유리가공업도 하고 있다. 오론과 제파에는 인산비료공장이 있고 로시 조하르에서는 천연 가스가 생산된다.

 

오늘날 사람들이 많이 모여살기 시작하면서 이 지역의 도시화가 이루어졌다. 네겝 지방의 수도인 브에르 세바는 텔아비브야포·예루살렘·하이파 도시권을 제외하면 이스라엘에서 가장 큰 도시이다. 아라드(1961)와 디모나(1955), 이스라엘에서 홍해로 나가는 출구인 항구도시 엘랏(1949) 등의 계획도시도 세워졌다.

 

한 여름에는 구름 한조각 없는데...10월 말엔 구름 가득...10월이라고 하지만 한낮의 햇살은 뜨겁기 때문에 구름의 그늘은 고마움이었습니다.

 

 

 

 

Shkhoret 산...해발 586m

 

 

오른쪽 끝부분에 엘랏의 홍해가 보입니다.

 

 

 

엘랏 시내를 바라보고...엘랏 만 또는 아카바 만 또는 홍해라고 부름...

 

 

 

 

 

 

 

 

 

 

 

 

 

 

 

 

 

 

 

요르단 지역의 산악지대

 

 

 

엘랏 시내 전경...중간에 건물들이 있는 호텔촌까지가 이스라엘 영토이고 그 너머는 요르단...

 

 

 

 

 

 

 

 

 

 

 

 

 

 

 

 

 

 

 

 

 

 

 

 

 

 

 

 

 

 

 

 

 

 

 

 

 

Netafim 샘...사진 중간부분...돌 밑에 검은 부분...

 

좁은 틈새를 비집고...

 

 

 

 

엘랏 주변의 산세는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능선 위쪽에 보이는것이 이집트와의 국경...엉성한 경계 구조물...산세가 험해서 저것마저도 불필요해 보였지만...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국경에 있는 초소...

 

초소 감시탑...

 

 

 

이집트와 국경선이 이렇게 험한 산으로...

 

 

 

 

 

 

 

 

 

 

 

 

 

 

홍해가 보이고...홍해 너머는 요르단 지역...

 

 

 

 

 

 

큰 배 너머는 요르단 지역 시가지...

 

 

 

 

 

 

엘랏...이스라엘 지역 시가지...

 

 

 

 

이집트 방향...타바 국경 너머....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국경 경계선...

 

 

이스라엘 도보순례 마지막 지점....타바 국경의 홍해 해안가...

 

길의 끝부분이 이집트와의 경계인 타바국경입니다. 오후 4시 엘랏에 도착하여 여정을 마무리 했습니다.

 

땀에 흥건이 젖은 모습...

 

 

 


엘랏(Elat)은 1949년의 정전협정에 따라 확정된 이스라엘 영토의 남쪽 끝에 해당하며, 네게브 사막 남쪽 끝, 홍해 위쪽 오른편의 아카바 만(히브리어로 미프라츠엘랏) 꼭대기에 자리잡고 있는 이스라엘에 있는 항구도시이다.

 

엘랏은 성서에 여러 차례 언급되어 있는 도시로서 열왕기 상 9장에 따르면 솔로몬 왕의 배들이 '엘랏 근처'에 있는 ‘에츠욘 게베르’에다 상선대를 만들어 오피르 땅까지 갔다가 금을 싣고 돌아왔다고 한다. 1940년 이후 고대 에츠욘 게베르 지역을 탐사해온 고고학자 넬슨 글루에크는 에츠욘 게베르가 엘랏과 완전히 일치한다고 결론지었다. 이 고대도시 유적은 지금의 엘랏 시 동쪽에 자리 잡고 있으며 요르단 지역에 속한다.

1열왕 9,26-28 (솔로몬의 무역 활동) 솔로몬 임금은 에돔 땅의 갈대 바닷가, 엘랏 근처에 있는 에츠욘 게베르에다 상선대를 만들었다. 히람은 자기 종들 가운데 바다에 익숙한 선원들을 상선대와 함께 보내어, 솔로몬의 종들과 함께 있게 하였다. 그들은 오피르로 가서 금 사백이십 탈렌트를 실어 와 솔로몬 임금에게 바쳤다.

 

 

엘라트는 로마 제국과 나바테아 왕국(고대 아라비아의 셈족이 세운 나라)의 국경 요새들이 늘어선 리메스팔레스타인의 남쪽 전방초소가 있었던 곳으로, 7세기에 이슬람 제국이 아라비아 반도를 정복하자 유대인들이 이들을 피해 이주해간 곳이기도 하다. 아일라로 불렸던 이 도시는 1116년 십자군에게 점령되었다. 남쪽으로 14㎞ 떨어진 곳에는 작은 산호섬인 하알무김 제1섬이 있다. 그라예 섬으로 불리기도 하는 이 섬에는 십자군 지배지역의 남쪽 끝을 이루는 요새가 유적으로 남아 있다. 1167년 살라딘에게 정복된 뒤 쇠락했다. 1948년 5월 15일 영국의 팔레스타인 위임통치가 끝나면서 엘랏은 움라슈라시라고 불렸던 버려진 국경초소 외에는 아무 것도 남겨진 것이 없는 상태가 되었다. 1949년초 후방지역인 브에르 세바 기지에 있던 이스라엘 군대가 당시에 길도 나 있지 않던 네겝 사막을 가로질러 225㎞를 전진하여, 같은 해 3월 10일 엘랏에 도착함으로써 이스라엘령 홍해안을 점령했다. 이것이 1948-49년 아랍-이스라엘 전쟁의 마지막 작전이었다.

 

현대의 엘랏은 1949년에 건설되었으며, 1959년 시가 되었다. 이스라엘에서 홍해와 인도양, 그리고 극동지방으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출구이다. 1951년 4월 조그만 항구가 개설되었고, 1956년 시나이 전쟁 이후 이집트가 아카바 만 입구의 티란 해협에 대한 통제권을 잃어버리면서 더욱 확장되었다. 1967년 5월 이집트가 이 해협을 봉쇄하여 항구로서의 기능을 잃었고, 이 사건이 발단이 되어 1967년 6월 6일 전쟁이 일어났다. 수에즈 운하가 폐쇄된 1967~75년 티란 해협은 모든 나라에 개방되어 교역이 이루어졌으며, 엘랏도 다시 확장되었다. 송유관이 설치된 새로운 유조선 선착장이 건설되어, 당시 하이파 북쪽에 있던 지중해 연안의 아슈켈론까지 연결되었다. 기후가 매우 덥고 건조하기 때문에 정부 차원에서 거주민들에게 여러 가지 특혜가 제공되었는데, 이러한 정책적인 배려로 건설 이후 20년 동안 인구가 25배로 늘었다. 간선도로 및 정기항공 편으로 이스라엘의 많은 거주지들과 연결된다.

 

물이 맑은 홍해의 해변은 그림 같은 산호초와 바다생물들이 있어 관광지로 발전했으며, 스쿠버다이빙도 즐길 수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관련 성경 구절 : 엘랏>

1. 신명 2,8 우리는 엘랏과 에츠욘 게베르와 아라바 길을 버리고, 세이르에 사는 우리의 친족인 에사우의 자손들을 비켜 지나갔다. 그런 다음에 우리는 발길을 돌려 모압 광야 길을 따라 지나갔다.

2. 1열왕 9,26 솔로몬 임금은 에돔 땅의 갈대 바닷가, 엘랏 근처에 있는 에츠욘 게베르에다 상선대를 만들었다.

3. 2열왕 14,22 아마츠야가 자기 조상들과 함께 잠든 뒤에, 아자르야는 엘랏을 재건하여 유다에 복귀시켰다.

4. 2열왕 16,6 바로 그 무렵에 아람 임금 르친은 엘랏을 아람에 복귀시키고, 엘랏에서 유다인들을 몰아내었다. 그리하여 에돔인들이 엘랏으로 가서 오늘날까지도 그곳에 살고 있다.

5. 2역대 8,17 솔로몬이 에돔 땅의 바닷가, 에츠욘 게베르와 엘랏으로 갔다.

6. 2역대 26,2 아마츠야가 자기 조상들과 함께 잠든 뒤에, 우찌야는 엘랏을 재건하여 유다에 복귀시켰다.

 

 

1949년 3월 10일, 브에르 세바에 있던 이스라엘 보병은 네겝 사막을 가로질러 225㎞를 전진하여, 엘랏을 수복하였습니다. 이때 통신병은 '엘랏을 조국 이스라엘에 받친다'는 전문을 보내고 병사들은 잉크로 이스라엘 국기를 그려 개양했다고 합니다.

 

엘랏 호텔촌과 백사장...

 

 

 

타바 국경 가까운 곳에 있는 마리나...해양 박물관과 레저시설...

 

 

 

 

저 멀리 엘랏 호텔촌이 보이고...오른쪽은 요르단 지역...

 

타바 국경쪽...이집트 쪽

 

 

 

 

 

 

 

 

 

해저 물고기들을 관람하는 잠수정...

 

 

 

 

 

엘랏의 일몰...

 

엘랏 버스터미널.

 

 

 

하늘은 하느님의 영광을 이야기하고

창공은 그분 손의 솜씨를 알리네.

(시편 1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