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

예루살렘 대성전(Temple of Jerusalem)

테오필로 2009. 7. 18. 16:23

예루살렘 대성전(Temple of Jerusalem)

 

다윗이 예루살렘을 수도로 정한지 약 3000년의 역사가 흘렀다. 그 역사의 중심에 있는 곳이 바로 ‘예루살렘 성전’이다. 우리는 이스라엘 3000년의 역사에서 그 주인공은 유대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유대인이 지배하던 시대는 약 550년, 그리스도교는 약 400년 그리고 그 둘보다 훨씬 많은 약 1200년 기간 동안 이슬람이 통치했고, 나머지는 기타 외세에 의해 다스려졌다.

 

아브라함 시대에 예루살렘은 멜키체덱(멜키세덱) 왕이 다스렸다(창세 14,18). 예루살렘의 본래 이름은 ‘살렘’ 이었다. ‘살렘’은 ‘평화’라는 뜻이며,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시’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스라엘만큼 평화가 간절한 곳은 없을 것이다. 세계 3대 종교의 각축장이었고, 세계열강들이 지나가야만 하는 길목에 놓여 있는 이스라엘의 중심에는 예루살렘이 그리고 그 중심에는 예루살렘 대성전이 있었다.

예루살렘 성전은 유대인들에게 모든 시대를 통하여 삶의 중심이었다.  하느님의 현존을 상징하는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예배와 기도의 중심지였고 강력한 상징적 역할을 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성전은 하느님이 현존 하시는 곳이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희생 제사로 하느님께 다가가며 만나며, 하느님은 용서와 계시로써 기도에 응답하시는 곳이었기 때문이다(탈출 25,22; 2역대 6참조).

그러나 그  삶의 중심을 한 때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리고 지금은 이슬람이 차지하고 있다.

 

예루살렘 구 시가지의 1/6을 차지하고 있는 예루살렘 성전터. 지금은 이슬람의 바위돔 사원이 자리하고 있다. 

 

 

가나안과 이집트 땅 온 지방에 기근이 심하게 들었을 때 아브라함의 후손인 야곱의 가족들은 이집트로 가서 살았다(창세 41,53-50,26). 그 후 기원전 1230년경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야곱의 후손들은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맹세한 땅으로 이주한다(탈출 33,1). 그러나 이스라엘은 ‘약속된 땅’으로 바로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사십 년 동안 떠돌이 생활을 해야 했다(민수 32,13; 신명 29,4). 그리고 모세는 ‘약속된 땅’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사해 근처 모압 땅 ‘느보 산’에서 죽게 된다(신명 34,1-8). 모세는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여 후계자로 임명하였고(신명 34,9) 주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통수권을 맡기셨다(여호 1,1-9). 그는 요르단 강을 지나서(여호 3,1-4,24) 길갈에 진을 치고 가나안에서 첫 파스카 축제를 지낸다(여호 5,10-12). 여호수아는 예리코(여호 5,13-6,27)와 가나안을 점령(여호 11,16) 한 후 열두 지파에게 땅을 분배하고(여호 12,7-19,51) 스켐에서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를 모아 백성과 계약을 맺고 그들을 위한 규정과 법규를 세웠다(여호 24,1―27). 그 후 여호수아가 죽고 가나안 땅은 판관들의 시대가 시작된다(기원전 1200-1000년).

 

사무엘이 예언자이자 판관으로 다스릴 때 사무엘이 나이가 많아지자 이스라엘 원로들은 사무엘을 찾아가 다른 민족들처럼 임금을 세워주기를 간청한다(1사무 8,5). 그리고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사울(1030-1010년)의 머리에 기름을 붓고(1사무 10,1)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세운다. 사울은 그의 세 아들들과 함께 길보아 산에서 필리스티아인과 싸우다가 모두 전사(1사무 31,1-6)하였다.

 

사울이 죽은 뒤 다윗(기원전 1000-961년/1004-965년 재위)이 헤브론에 자리를 잡고 있을 때 유다 사람들이 다윗에게 와서 기름을 붓고 그를 유다 집안의 임금으로 세웠다(2사무 2,3-4). 다윗이 헤브론에서 일곱 해를 다스린 후(1역대 29,27; 2사무 5,5) 이스라엘 12지파를 통합하면서 남쪽에 치우쳐 있던 수도를 예루살렘으로 삼은 것이(2사무 5,4-5) 지금으로부터 약 3000년 전이다.

 

다윗 시대의 예루살렘은 이민족인 여부스족이 사는 견고한 성곽도시였으나(2사무 5,6 참조) 다윗의 병사들은 키드론 골짜기에 있는 기혼샘과 연결된 지하 수로를 타고 올라가 여부스족의 성읍을 점령하고 ‘다윗 도성’(The City of David)라 불렀다(2사무 5,7-9). 그리고 정치적인 수도인 예루살렘은 키르얏 여아림에 있던 계약의 궤를 다윗 도성에 옮겨 놓음으로써(2사무 6장 참조) 다윗 도성은 명실상부한 다윗 왕국의 중심이 되었다. 계약의 궤는 이스라엘 12지파를 통합할 수 있는 최고의 상징물이었으며 왕권과 직결 된 것이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비스듬하게 성곽으로 둘러 있는 것이 다윗 도성과 오른쪽 솔로몬 성전이 있는 곳 

다윗 도성과 모리야 산의 솔로몬 성전. 솔로몬 성전을 둘러싼 사각형의 영역은 헤로데 대왕이 넓힌 것. 검정색으로 표시한 성곽은 현재 예루살렘 성곽이다. 성전 아래쪽 검은 영역은 이스라엘 정부에 의해 고고학 발굴이 된 지역

 

 

 

1. 솔로몬 성전 - 제1성전(Solomon's Temple - First Temple)

다윗 도성에 계약의 궤를 옮기고 난 후 “나는 향백나무 궁에 사는데, 하느님의 궤는 천막에 머무르고 있음”을 안타까워한 다윗은 “하느님이 머무실 집”을 짓고자 하나 다윗의 후손에게서 그 일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나탄의 예언을 통해 약속 하셨다(2사무 7,1-13; 1열왕 8,17-19; 1역대 22,7-10).

 

2사무 7,12-13 너의 날수가 다 차서 조상들과 함께 잠들게 될 때, 네 몸에서 나와 네 뒤를 이을 후손을 내가 일으켜 세우고, 그의 나라를 튼튼하게 하겠다. 13 그는 나의 이름을 위하여 집을 짓고, 나는 그 나라의 왕좌를 영원히 튼튼하게 할 것이다.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사악을 번제 제물로 바치려고 했던(창세 22,1-22참조) 모리야 산은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사무엘서는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이었는데 다윗이 집터로 잡아 놓았다(2역대 3,1).

CARAVAGGIO, The Sacrifice of Isaac, Oil on canvas, 116 x 173cm, Piasecka-Johnson, Collection, Princeton

 

CARAVAGGIO, The Sacrifice of Isaac, Oil on canvas, 104 x 135cm, Galleria degli Uffizi, Florence 

 

다윗은 이스라엘과 온 유다의 인구조사를 하여 주님께 죄를 지었고 다윗은 세 가지 벌 중 사흘 동안 흑사병이 퍼지는 것을 선택하였다. 단에서 브에르 세바까지 치시고 주님의 천사가 예루살렘을 파멸시키려고 그쪽으로 손을 뻗치자 주님께서는 재앙을 내리신 것을 후회 하시며 명을 거두었을 때 주님의 천사는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 서 있었다. 다윗은 아라우나에게 은 50 세켈을 주고 타작마당과 소를 사 주님을 위한 제단을 쌓고 번제물과 친교 제물을 바치자 주님께서는 그의 간청을 들어 주시어 이스라엘에 내리던 재난이 그쳤다(2사무 24,1-25참조; 1역대 21,1-22,1참조; 2역대 3,1).

 

2역대 3,1 솔로몬은 예루살렘 모리야 산에 주님의 집을 짓기 시작하였다. 그곳은 주님께서 그의 아버지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으로서, 본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이었는데 다윗이 집터로 잡아 놓았다.

 

‘평화’라는 뜻을 가진 솔로몬은 아버지 다윗 왕이 마련해(1역대 22,2-19;28,1-29,9 참조) 준 땅과 성전 재료를 토대로 대성전과 ‘레바논 수풀 궁’(1열왕 7,2; 2역대 9,16)이라는 화려한 왕궁을 지었다(2역대 3,1-5,1; 1열왕 5,15-7,51).

 

솔로몬은 이스라엘을 다스린 지 4년째 되던 해인 기원전 968년에 모리야 산(해발 744m) 위에 주님의 집을 짓기 시작하여(1열왕 6,1) 7년의 공사 기간을 거쳐 기원전 961년에 완공하였다(1열왕 6-8장; 2역대 3-5장 참조).

 

솔로몬 성전이 있는 모리야산의 단면도. 성전을 만들기 위해 동쪽과 서쪽 언덕을 메웠다.

 

 

1열왕 6,38 그리고 제십일년 불 달, 곧 여덟째 달에 그 집은 모든 부분이 설계한 대로 완공되었다. 솔로몬이 그 집을 짓는 데에는 일곱 해가 걸렸다.

 

 

솔로몬은 티로 임금 히람에게서 레바논의 향백나무와 기술자들의 도움을 받아(1열왕 5,15-32; 2역대 2,1-17 참조) 주님께 지어 바친 성전은 길이가 예순 암마(약 28m. 1암마(cubit) : 고대 길이의 단위로 팔꿈치에서 가운데 손가락 끝까지의 길이. 약 43-53cm. 성경에서는 약 46cm로), 너비가 스무 암마(약 9m), 높이가 서른 암마(약 14m)였다(1열왕 6,2). 주님의 집 성소 앞에 있는 현관은 좌우 길이가 그 집의 너비와 똑같은 스무 암마이고 집 앞으로 나온 그 현관의 길이는 열 암마였다(1열왕 6,3). 그리고 성전 건물의 현관 쪽을 제외한 세 면에는 성전의 보물이나 제구 등을 보관하는 창고가 붙어 있었다(1열왕 6,5; 7,51 참조).

 

 

 

성전은 넓이 약 9m, 길이 28m, 높이 14m의 장방형 구조로 성전 건물은 동쪽을 향했고, 동쪽 현관 쪽을 제외한 나머지는 곁방을 만든 구조였다.

 

솔로몬 성전의 단면도 : 1.곁방(창고방)  2.지성소  3.성소(본관)  4.현관방  5.커룹  6.계약의 궤  7.아브라함이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려고 했던 바위  8.물두멍(받침대)  9.청동 바다 모형. 

 

3번 성소 본관에는 1.분향 금 제단 2.제사 빵을 차려 놓는 금 상, 3.양쪽에 다섯 개씩 열개의 순금 등잔대들이 놓여 있다. 집의 온 벽은 안팎으로 돌아가며 커룹과 야자나무와 활짝 핀 꽃을 새겨 넣고, 집의 안쪽 방과 바깥쪽 방바닥을 금으로 입혔다.

 

성전 오른쪽 남동쪽에는 ‘청동 바다 모형’을 두었는데(1열왕 7,39; 2역대 4,10) 지름이 열 암마(약 4.6m), 높이가 다섯 암마(약 2.3m), 둘레가 서른 암마(약 14m)가 되는 청동 바다 모형을 만들었는데 이 바다는 물 이천 밧(1밧은 약 40리터)을 담을 수 있었다. 이 바다는 황소 열두 마리 위에 놓여 있었는데 동서남북으로 세 마리씩 모두 엉덩이를 안쪽으로 향하게 놓여 있었다(1열왕 7,23-26). 바다에 담긴 물은 사제들이 몸을 씻는데 사용하였다(2역대 4,6).

청동으로 만든 물두멍(받침대)을 열 개 만들었는데 길이가 네 암마(약 1.8m), 너비가 네 암마, 높이가 세 암마(약 1.4m)로 한 암마 반이나 되는 청동바퀴 네 개와 청동 바퀴축이 있었다(1열왕 7,27-35). 성전 동편 오른쪽에 다섯 개, 왼쪽에 다섯 개를 두었는데(1열왕 7,39) 이 물두멍은 번제물로 바칠 것을 씻었다(2역대 4,6).

 

1.물두멍(받침대)  2.청동 바다 모형  3.보아즈  기둥  4.야킨 기둥 

 

현관(ulam)에는 현관에는 두 기둥을 세웠는데 오른쪽에 세운 기둥의 이름은 야킨이라 하고 왼쪽에 세운 기둥의 이름은 보아즈라 하였다. 그리고 그 기둥 꼭대기에는 나리꽃 모양으로 만든 것을 얹었다(1열왕 7,21-22;2역대 3,17참조). 중앙에 있는 성소(hekhal)에는 분향 금 제단과 제사 빵을 차려 놓는 금 상, 안쪽 성소 앞 오른쪽에 다섯 개 왼쪽에 다섯 개씩 두는 순금 등잔대들(1열왕 8,48-49; 2역대 4,8)이 있었다.

 

솔로몬은 집의 가장 깊숙한 곳에 지성소(debir)를 마련하고 그곳에 주님의 계약 궤를 모셨다(1열왕 6,19). 계약의 궤는 성전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서 하느님의 현존 자체를 나타내고 그분과 이스라엘이 맺은 계약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 안쪽 성소의 길이는 스무 암마(약 9m), 너비가 스무 암마, 높이가 스무 암마인데 순금으로 입혔다(1열왕 6,20). 솔로몬은 집 전체를 온통 금으로 입히고, 안쪽 성소에 딸린 제단도 모두 금으로 입혔다(1열왕 6,22). 그는 안쪽 성소에 올리브 나무로 높이가 열 암마(약 4.6m)나 되는 금으로 입혀진 커룹을 둘 만들어 놓았다(1열왕 6,23-28). 커룹은 하느님의 위엄 있는 현존을 상징했다. 집의 온 벽은 안팎으로 돌아가며 커룹과 야자나무와 활짝 핀 꽃을 새겨 넣고, 집의 안쪽 방과 바깥쪽 방바닥을 금으로 입혔다(1열왕 6,29-30). 이 커룹의 한쪽 날개는 아래로는 계약의 궤를 지켜 주고 다른 한쪽 날개는 하늘에 있는 하느님의 옥좌 역할을 하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다. 이 지성소는 대사제만이 일 년에 단 한 번 대 속죄일에 들어가 자기와 백성이 모르고 지은 죄를 없애는 희생 제사를 봉헌할 수 있었다(레위 16,32-34; 히브 9,7).

성소에서 지성소로 통하는 문은 올리브나무로 만들어 금을 입혔으며 현관과 성소를 구분하는 문도 마찬가지였다(1열왕 6,31-35; 2역대 4,22 참조). 성전 건물에는 사제들만이 접근할 수 있었고 일반 백성은 들어갈 수 없었다.

 

솔로몬은 계약의 궤를 다윗성에서 새로운 성전으로 옮겨 성대한 봉헌식을 올렸다(2역대 5,2-7,10; 1열왕 8,1-66참조).

 

사제들이 주님의 계약의 궤를 집의 안쪽 성소인 지성소에 놓았다(1열왕 8,6). 계약의 궤 안에는 두 개의 돌 판이 있었는데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집트 땅에서 나올 때 주님께서 그들과 계약을 맺으신 호렙에서 모세가 넣어둔 것이었다(1열왕 8,9; 2역대 5,10). 사제들이 성소에서 나올 때 구름이 주님의 집을 가득 채웠다. 주님의 영광이 주님의 집에 가득 찼던 것이다(1열왕 8,10-11; 2역대 5,13-14).

 

이제 솔로몬의 성전은 이스라엘 모든 남자들이 지내야 하는 3대 축제 즉 이집트 종살이에서 해방된 과월절-무교절(파스카)과 씨를 뿌려 얻는 노동의 맏물을 바치는 수확절(오순절) 그리고 노동의 결실을 거두어들이는 연말에 드리는 추수절(초막절)에 모이는 중심이 되었다(탈출 23,14-17; 34,18-23 참조).

 

이스라엘 백성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하는(다니 6,11) 풍습이 생겨났고, 유대교 회당의 주요 부분도 예루살렘 성전을 향하여 지어졌다. 기원 후 2-3세기의 회당을 보면 회당 정면 입구가 그리고 5세기경에는 설교단 부분이 예루살렘을 향하도록 만들어졌다.

 

다니 6,11 그의 집 옥상 방 창문은 예루살렘 쪽으로 나 있었다. 그는 이전에도 늘 그러하였듯이, 하루에 세 번 무릎을 꿇고 자기의 하느님께 기도하고 감사를 드렸다.

 

 

하느님의 집을 봉헌하면서 주님의 제단 앞에 서서 하늘을 향하여 두 손을 펼치고 드리는 솔로몬의 기도는 한편의 대서사시와 같이 장엄하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인간이 만든 성전에 머무르실 하느님이 아니시다. 현인 솔로몬은 주님의 집인 성전을 짓고 혹시라도 있을 수 있는 우상숭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당신께서 당신의 이름을 두겠다고 하신 이곳’(1열왕 8,27-29; 2역대 6,18-20)을 기도에서 언급하면서 논쟁을 피해 갔다. 온 우주의 하느님은 솔로몬의 성전에 갇혀 계신 분이 아니시라 당신께서 이스라엘과 맺은 계약을 이루시려 현존하시는 곳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이스라엘만의 하느님이 아니라 당신을 경외하는 모든 이방인들의 하느님이기도 하다. 예루살렘의 하느님은 우주의 유일하신 하느님이시기에 이방인들까지 아우르는 보편적이신 하느님이시라는 것이다.

 

‘주 저의 하느님! 어찌 하느님께서 땅 위에 계시겠습니까? 저 하늘, 하늘 위의 하늘도 당신을 모시지 못할 터인데, 제가 지은 이 집이야 오죽하겠습니까? 그러나 당신께서 ‘내 이름이 거기에 머무를 것이다’고 말씀 하신 이곳을 살피시어 당신 종과 당신 백성 이스라엘이 이곳을 향하여 드리는 간청을 들어 주십시오. 부디 당신께서 계시는 하늘에서 들어 주시어 들으시고 용서해 주십시오. 당신께 죄를 지어 이 땅에 기근이 들 때, 흑사병과 온갖 환난과 질병이 번질 때 이 집을 향하여 두 손을 펼치고 무엇이나 기도하고 간청하면 당신께서는 계시는 곳 하늘에서 들으시어 용서해 주시고 행동하십시오. 당신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아시니 그 모든 행실에 따라 갚아 주십시오. 비록 이방인이라도 그가 당신 이름 때문에 먼 고장에서 찾아와 이 집을 향하여 기도하면 당신께서는 하늘에서 들으시고 그 이방인이 당신께 호소하는 모든 것을 들어 주십시오. 죄짓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마음을 돌이켜 회개하고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지은 이 집을 향하여 기도하면 당신이 계시는 곳 하늘에서 그들의 기도와 간청을 들으시고 그들의 사정을 돌보아 주십시오’(1열왕 8,22-61; 2역대 6,12-42 참조).

 

1열왕 8,41-43 또한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 속하지 않은 이방인이라도, 그가 당신 이름 때문에 먼 고장에서 찾아오거든, 42 곧 그들이 당신의 위대한 이름을 듣고, 당신의 강한 손과 뻗은 팔이 하신 일을 듣고 와서 이 집을 향하여 기도하면, 43 당신께서는 계시는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그 이방인이 당신께 호소하는 것은 무엇이나 이루어 주십시오. 그렇게 하시면 이 세상 모든 민족들이 당신의 이름을 알아 모시고,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처럼 당신을 경외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제가 지은 이 집이 당신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2역대 6,32-33 참조).

 

 

솔로몬의 치세는 약 40년간 계속 되었으나 솔로몬이 유지하려 했던 국가적 통합은 기원전 931년 솔로몬의 죽음과 함께 끝나고 말았다. 다윗과 솔로몬의 지도 아래 약 80년간 통일 왕국은 정치와 신앙을 하나로 통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솔로몬 사후 약 350년은 정치적 분열의 역사요 군사적 패배의 역사이며 종교적 분쟁의 역사였다.

 

솔로몬은 하느님 대신 군사력에 의존하면서 외국의 많은 여자들을 후궁(왕족출신 아내 700명과 후궁 300명)으로 맞아들이면서 그들의 이방신들을 허용하고(1열왕 11,1-8 참조) 모세의 법을 정면으로 위반하였다(신명 17,3.17; 18,9-14 참조).

솔로몬이 죽자 왕국은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로 분할되었고(1열왕 12장), 북 이스라엘은 아시리아에 의해 기원전 721년에 멸망한다(2열왕 17,6). 남 유다는 히즈키야 왕의 개혁(2열왕 18,1-8;2역대 32,1-8 참조)과 요시아 왕의 개혁(2열왕 22,1-2; 23장)과 노력이 있었지만 므나쎄 왕 시대(기원전 697-642년 재위)에 유다 땅은 아시리아의 속국이 되었고,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기원전 605-562년 재위)이 기원전 586년에 예루살렘을 점령한 후에 유다인들은 바빌론 땅으로 가서 유배 생활을 하게 된다(2열왕 25장; 2역대 36,17-20). 바빌론 군대에 의해 예루살렘의 성전과 왕궁은 모두 파괴되었고, 유다인들은 포로로 끌려가고 성전의 기물들은 전리품으로 빼앗겼다(2열왕 25,1-21; 예레 52,13.17-23). 이렇게 처녀 예루살렘은 철저하게 짓밟히고 말았다(애가 1,1-4,22 참조).

 

애가 1,4 축제를 지내러 가는 이들이 없어 시온을 향한 길들은 비탄에 잠기고 성문들은 모두 황폐하게 되었으며 사제들은 탄식하고 처녀들은 슬픔에 젖어 있으니 시온도 쓰라려하는구나.

 

 


 

 

2. 제2차 성전 시대(기원 전 515-기원 후 70년)

 

2.1 바빌로니아 유배에서 귀한 후의 성전

페르시아 아카이메니아 왕조의 창시자이자 바빌로니아를 무너트린 키루스(고레스) 2세는 기원전 538년 칙령을 내려 포로로 잡혀온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을 재건하도록 허락했다(2역대 36,22-23; 에즈 1,1-5).

바빌론으로의 유배를 모면하고 새로운 세력으로 부상한 토착민들과의 갈등 속에서 즈루빠벨에 의해서 어렵게 성전을 재건 봉헌한 것은 기원전 515년(에즈 5,1-6,18)이었지만 70여년 만에 재건한 예루살렘은 예전의 화려했던 면모는 찾아볼 수 없었다. 제1성전에 비하면 규모도 적었고 볼품도 없었으며 성벽은 여전히 허물어져 있었고 성문들은 불탄 채였으며 귀향민과 토착민간의 갈등은 여전했다(느헤 1,1-4). 그리고 성전에서 가장 중요한 계약의 궤는 안치되지 못했다. 왜냐하면 예레미야 예언자가 성전이 파괴되기 전에 신탁을 받고 천막과 계약 궤를 들고 모세가 죽어 묻힌 느보 산 어느 동굴에 숨기고 입구를 막아 버렸는데 그 길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2마카 2,4-8).

 

2마카 2,4-8 같은 문헌에 이러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신탁을 받고 나서 사람들에게 천막과 계약 궤를 들고 자기를 따라오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올라가 하느님의 상속 재산을 본 그 산으로 갔습니다. 5 거기에 가서 예레미야는 동굴 집을 발견하고 천막과 계약 궤와 분향 제단을 그곳에 안치하고 나서 입구를 막아 버렸습니다. 6 그를 따라간 몇 사람이 길을 표시해 두려고 다가갔지만 그곳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7 예레미야가 그것을 알고 그들을 꾸짖고 나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 장소는 하느님께서 백성을 다시 한데 모으시어 자비를 보이실 때까지 알려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어야 한다. 8 그때에 가서야 주님께서는 저 물건들을 드러내실 것이다. 그리고 모세 위에 나타났듯이, 솔로몬이 그 장소가 특별히 성화되도록 청하였을 때에 나타났듯이, 주님의 영광과 구름도 나타날 것이다.”

이 제2성전 시대에 예식은 의식화 되고 희생제사가 중시되게 되면서 예루살렘은 잠시 평온을 되찾게 된다(느헤 3장).

 

기원전 332년 그리스의 알렉산더 대왕의 침입으로 팔레스티나 전역은 헬레니즘 시대에 들어가게 된다(기원전 332-167년). 팔레스티나에는 그리스식 도시들, 극장과 목욕탕, 경기장들이 건설되었고 시민들의 의식주뿐만 아니라 정신문화까지 급속히 바뀌기 시작했다.

 

그리고 ‘신의 현현’이라고 불리는 시리아 왕 에피파네스 안티오쿠스 4세(기원전 175-164년 재위)는 기원전 167년에 예루살렘 성전을 더럽히고 이교제사를 거행하고 유다인을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예루살렘에 제우스 신전을 짓고 숭배하도록 강요하였고, 더 나아가 율법에서 금지하고 있는 돼지고기를 먹도록 했으며 안식일을 위반하도록 하고 할례를 금지시켰다(마카 상 1,44-50). 이것이 계기가 되어 기원전 167년에 급기야 마카오베오 형제들이 이끄는 독립군은 3년 만에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성전 제의를 회복하였으며 하스모니아 왕조를 세웠지만 이들은 왕가의 후손도, 제사장인 사독 가문의 출신도 아니었기에 정통성이 결여되어 있었다. 급기야 여러 종파간의 갈등 속에 예루살렘은 기원전 63년에 로마의 폼페이우스 장군( Pompeius Magnus, 기원전 106-48)에게 정복되고 로마의 지배하에 머물게 된다.

 

 

2.2 헤로데 성전(Herod's Temple)

 

기원전 37년, 이두매 출신 헤로데(기원전 37-4년 재위)가 로마 황제의 총애를 받아 유대 왕이 되었다. 헤로데는 비록 유대인 행세를 했으나 부계와 모계 모두 아랍 혈통이었으며, 정치적 목적으로 하스몬 왕가의 공주 마리암과 재혼을 하였다. 그리스-로마 문화의 예찬자였던 헤로데 대왕은 거대한 성전과 왕궁, 원형 경기장, 목욕탕, 도로, 광장과 요새들을 지어 위대한 건축가로서의 명성을 날렸다. 헤로데는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제2성전을 재건하고 부속 건물과 주변의 요새들을 건축하기 시작하였다. 사두가이들의(Sadducee, 기원 후 70년 제2차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당하기 전의 약 2세기 동안 번성했던 유대교 제사장 분파) 열렬한 지지를 얻은 성전 재건축은 기원전 20년에 시작되었다(유대고사XV, 380).

헤로데는 즈루빠벨이 지은 제2성전을 부수지 않고 희생 제사나 제물 봉헌도 중단시키지 않으면서 새로운 성전을 만들었다. 성전 건물 자체는 1년 반 정도 걸려 완성되었다.

요한복음 2장 20절에 의하면 성전은 46년이나 걸려서 완성되었다고 하지만 예수님께서 활동하실 당시에는 성전이 완성되지 않았었다(마르 13,2참조). 역사가들은 헤로데가 죽고 68년이 지난 뒤인 기원후 64년 헤로데 아그리빠 2세에 의해서 완성되었다고 말한다.

 

새 성전은 코린트(Corinth) 건축 양식을 따라 하얀 대리석 기둥이 쭉 늘어서 있어 역사가 요세푸스의 표현을 빌면 먼 곳에서 보니 마치 ‘눈 덮인 산 같았다’고 한다. 헤로데는 성전을 더욱 큰 규모로 세우고 외벽을 흰 돌로 입혔다.

성전 본체 주변은 높은 돌담으로 성전 전체를 둘러쌌다. 일반인이 들어가지 못하는 성전의 가장 거룩한 부분을 건축하기 위해서 천여 명의 사제들이 벽돌공과 목수로 훈련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성전 건물 자체는 벽이나 난간으로 둘러싸 거룩한 영역을 이방인의 뜰과 분리시켰다. 사방 벽에는 이방인들이 그곳에 들어올 경우 사형에 처할 것이라는 경고문이 붙어 있었다고 한다. 이방인들의 뜰은 이방인과 유다인 모두에게 개방되어 있는 커다란 뜰이었다. 성전 안에는 세 개의 뜰이 있었는데 바깥쪽에서부터 여인들의 뜰, 유다인 남자들만 들어갈 수 있는 이스라엘의 뜰, 사제들의 뜰이 차례로 있었다.

 

1.안토니아요새 2.행각 3.솔로몬의 행각 4.왕실의 행각 5.이방인의 뜰 6.난간 7.여인의 뜰 8.사제들의 뜰 9.성전 10.윌슨의 아치 11.로빈슨 아치 12.훌다문 13.수산문(오늘날 황금문)

14.미문 15.니카노르문(Nicanore) 16.이스라엘의 뜰 17.분향제단 18.분향제단으로 오르는 경사 19.정결례 욕조 20.희생제물을 잡는 곳 21.현관 22.성소 23.지성소 24.성소 방 25.나병환자 창고 26.장작 창고 27.나자렛인 창고 28.기름 창고 29.기타 창고 30.행각 31.출입문

예루살렘 이스라엘 박물관 경내에 있는 제2차 성전 모형도 

헤로데 대왕이 만든 성전의 제2차 성전의 모형 

 

성전 동편에 나 있는 수산문...오늘날의 황금문 자리.. 

  

여인들의 뜰과 이스라엘의 뜰(사제들의 뜰)을 이어주는 대문...니카노르 문

지성소로 들어가는 출입문 

 

아랫도시로 연결되는 계단...아치 다리가 파괴되어 성벽 벽면에 약간의 흔적만 남았었는데, 이 돌출부를 이상하게 생각했던 미국의 고고학자 로빈슨이 발견하여 아랫도시로 연결되는 아치가 있었음을 밝혀냈다. 그 후 이 아치를 로빈슨 아치라고 부른다. 아래 사진에서 벽면에 조금 튀어나온 흔적이 남아있다. 

벽면의 돌출된 부위를 이상하게 여긴 로빈슨에 의하여 아랫마을로 연결된 아치였음이 고고학 발굴 작업으로 확인되었다. 

 

로빈슨 아치...아랫도시로 내려갈 수 있었다. 

윌슨(Wilson) 아치.  지성소와 가장 가까이에 있는 다리로 곧바로 대사제의 집으로 연결되었다고 한다. 

붉은 기와집은 성전 남쪽으로 왕실 회랑 

 

헤로데는 성전 뜰 남동쪽의 경사진 면과, 현재의 오펠쪽을 메우고, 동과 서로 높은 돌담을 쌓아, 성전 뜰의 넓이를 솔로몬시대의 2배로 확장했다. 성전 북쪽 길이는 314m, 남쪽 길이는 280m, 동쪽 길이는 469m 그리고 서쪽 길이는 485m로 불규칙한 장방형을 하고, 예루살렘 구시가의 약 1/6의 면적을 차지한다.

 

아래 도면은 성전 서쪽에서 바라본 도면. A.암반-원래 모리야 산 B.메워진 곳  C.현재 드러난 부분

1.로빈슨 아치  2.바클레이 문  3.윌슨 아치  4.고리 문  5.웨렌 통로  6.웨렌 문  

 

아래 도면은 성전 동쪽에서 바라본 도면. A.암반-원래 모리야 산 B.메워진 곳  C.현재 드러난 부분

1.성전 동남쪽 끝부분-예수님께서 마귀로부터 유혹을 받은 곳  2. 황금 성문  3.벳자타 계곡  4.이스라엘 연못

 

 

A는 성전 서남쪽 모퉁이, 그리고 B는 동남쪽 모퉁이. A와 B 사이에 A쪽으로 조금 치우쳐 솟아 있는것이 알 아크사 이슬람 사원. A와 B 아래쪽에 둥글게 굵은 실선으로 나 있는것이 원래 모리야 산 언덕...B 오른쪽 부분은 성전 북동쪽이다. 

 

성전 동남쪽 끝부분. 윗쪽에 드러나 있는 부분이 현재 성곽부분이며, 중간 부분은 메워진 곳이고...그 아래쪽은 원래 모리야 산 언덕 부분. 드러난 부분만큼 땅속에 묻혀 있다. 이 성전 꼭대기가 예수님께서 두번째 유혹은 받은 곳이라고 한다.

동남쪽 성전 모서리...동편에서 바라본 모습 

성전 동남쪽...예루살렘 성전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예수님께서 유혹 받으신 곳이라고 한다. 

루카 4,9 그러자 악마는 예수님을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운 다음, 그분께 말하였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여기에서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

 

 

예수님께서 사십일 밤낮으로 단식하신 후 악마는 예수님을 데리고 거룩한 도성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아래로 몸을 던지라는 유혹을 했던(마태 4,5-6; 루카 4,9-10) 장소라고 하는 성전 뜰 동남쪽의 거대한 돌담과 성전 서쪽의 통곡의 벽은 오늘도 볼 수가 있다. 통곡의 벽은 오늘날 유대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순례지가 되고 있다.

 

헤로데 대왕이 지은 제2차 성전 조감도.  성전 서남쪽 모서리를 중심으로...서남쪽 모서리에 나 있는 다리는 고고학자 '로빈슨'에 의하여 발견되어 로빈슨 아치라고 부른다. 그 왼쪽으로 있는것이 통곡의 벽이다. 그리고 모서리에서 오른쪽 벽면에 두개짜리 문은 예수님 당시에도 출입문으로 사용 되었던 이중문과 그 오른쪽으로 삼중문이 보인다.

 

성전 자체는 동쪽 가장자리에 있는 ' 여인들의 뜰'에서부터 시작되었는데, 이 뜰은 사방에 문이 하나씩 있고, 각 모퉁이에는 방이 하나씩 딸려 있었다. 이 뜰에서 반원형 계단으로 이루어져 있는 서쪽 문을 지나면 ' 이스라엘인들의 뜰'이 나오는데, 이 뜰은 모든 유대인 남자들에게 개방된 '사제들의 뜰'의 일부였다. 성소 바깥을 둘러싼 ' 사제들의 뜰'에는 제단과 사제들의 정결의식을 위한 청동 대야가 있었다. 이 뜰의 가장자리는 문들과 방들로 담이 둘려 있었다. 성소에는 제단에 올리는 빵을 놓는 상, 등잔대, 향 제단이 있었다. 천정에서 바닥까지 쳐져 있는 휘장으로 성소와 지성소는 구분되어 있었다(마태 27,51; 마르 15,38; 루카 23,45 참조).

 

 

성전 본당은 뒷면보다 앞면의 폭이 넓었다. 동쪽 정면에는 현관으로 통하는 문 양쪽에 기둥이 2개 서 있었다. 현관 안에는 다시 성소로 통하는 큰 문이 있었고, 성소 서쪽 끝은 지성소였다. 봉헌된 구역 가장자리에는 돌담과 성벽을 쌓아 이방인들의 접근을 막았다.

 

1.창고  2.지성소  3.휘장  4.성소(본관) 5.향제단  6.제사 빵을 차려 놓는 제대 7.일곱촛대(메노라)  8.금포도나무로 장식한 금을입힌 기둥  9.현관  10.아브라함이 이사악을 제사 지내려 했던 바위

 

 

예수님과 성전

헤로데 성전은 다시 한 번 이스라엘 민족생활의 중심이 되었다. 헤로데 성전은 종교의식의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성경 및 그 외 민족문학 자료들을 보관하는 곳이기도 했고, 로마 시대에 유대인 최고법정이었던 산헤드린의 집회소이기도 했다. 성전 밖으로는 주랑이 딸린 성벽을 쌓고 대문을 만들었다. 예수님과 율법 학자들이 가르치거나 토론하고 상인들이 장사를 한 곳이 주로 이 주랑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마르 11,15-17; 루카 2,46 참조). 새 성전 광장은 집회 장소로 활용 되었고, 상인들과 환전상들이 자리 잡았다.

 

신약 시대에 와서 유다인들의 생활에서 회당의 역할이 커졌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성전의 중요성은 구약에 비해 덜해졌지만 예루살렘 성전은 예수님과 초대 교회 역사 안에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세례자 요한의 탄생 예고와 아기 예수님의 봉헌, 소년 예수님과 학자들의 토론이 이루어졌던 곳이 바로 성전이었다(루카 1,9-23; 2,22-38.46-49 참조).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중에 성전에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토론하고 기적을 베푸셨다(마태 21,14.23; 26,55; 마르 12,35; 14,49; 루카 22,53; 요한 7,14.28; 8,20; 10,23-25; 18,20 등 참조). 예수님께서는 경건한 유다인의 한 사람으로 성전을 존중하셨는데 성전을 ‘하느님의 집'(마태 12,4; 마르 2,26; 루카 6,4), '내 아버지의 집'(루카 2,49; 요한 2,16), '기도의 집’(마태 21,13; 마르 11,17; 루카 19,46)이라고 부르셨다.

루카 2,49 그가 부모에게 말하였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대한 사랑과 열정 때문에 성전을 정화 하셨다(마태 21,12-13; 마르 11,15-17; 루카 19,45-48; 요한 2,14-17 참조). 성전 정화와 성전 파괴를 예고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성전보다 더 위대하시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마태 12,6; 요한 2,20-21).

마태 12, 6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요한 2,20-21 유다인들이 말하였다. “이 성전을 마흔여섯 해나 걸려 지었는데, 당신이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말이오?” 21 그러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성전과 관련된 예수님의 행위는 후에 죽음으로 내몰리는 주요한 죄목의 하나가 되었다(마태 26,59-61; 27,40; 마르 11,15-18; 14,55-58; 15,29 참조).

마태 26,61 “이자가 ‘나는 하느님의 성전을 허물고 사흘 안에 다시 세울 수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하였다

 

초대 교회의 사도들은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고 복음을 전하며 기적을 베풀었다(루카 24,53; 사도 2,46; 3,1-12; 5,12.20-21.25.42; 21,26; 24,12.18 등 참조). 

사도 5,20 “가거라.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모두 백성에게 전하여라.”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몸을 성전이라고 밝히고 있듯이(요한 2,19.21-22 참조)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새롭고 결정적인 성전이 되셨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는 순간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찢어졌음은 이를 반영한 것이다(마태 27,51; 마르 15,38; 루카 23,45 참조).

마태 27,51 그러자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갈래로 찢어졌다. 땅이 흔들리고 바위들이 갈라졌다.

 

이것으로 옛 유대교의 성전은 더 이상 하느님 현존의 상징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게 된 것이다. 이제 예루살렘 성전이 더 이상 하느님께 예배드리는 유일한 곳이 아니며 이제부터 믿는 이들은 영과 진리 안에서 그분을 예배하게 되었다(요한 4,21-24 참조).

 

예수님께서 몸소 세우셨고(마태 16,18 참조) 그분을 모퉁이 돌로 하여 세워졌으며(에페 2,20 참조) 그리스도의 몸 자체인 교회는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장소이다.교회 뿐만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 모두는 주님이 거하시는 살아 계신 하느님의 성전이다(1코린 3,9.16-17; 6,19; 2코린 6,16; 에페 2,20-22 참조). 

1코린 3,17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또한 믿는 이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몸의 한 지체로서(1코린 6,15; 12,27 참조) 성령께서 머무시는 성전이다.

1코린 6,19 여러분의 몸이 여러분 안에 계시는 성령의 성전임을 모릅니까?

 

 


 

 

헤로데가 만들고 있던 성전은 복음서에서도 그 아름다움을 극찬할 정도로(루카 21,5; 요한 2,20참조) 빼어난 성전이었지만 46년을 정성들여 지은 이 성전은 완공된 지 겨우 6년 만에 최후를 맞이해야 했다.

 

기원 후 66-70년에 일어난 유다 1차 항쟁을 진압한 로마의 티투스 황제(Titus, 79-81 재위)에 의해서 예루살렘은 ‘돌 위에 돌 하나’(루카 21,6)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완전히 파괴 되었다. 유대인들의 전승에 의하면 이 날은 유대 달력으로 아브(Av. 8월) 달의 9일째 되는 날로서 바로 기원전 586년에 솔로몬의 성전이 바빌로니아인들에 의해 불타 없어진 바로 그 날이었다. 제1차 성전과 제2차 성전이 똑같이 파괴된 이 운명의 날 유대인들은 성전이 파괴된 것을 슬퍼하며 통곡의 벽 앞에 전날 밤에 모여 밤새도록 예레미야의 애가를 읽고 단식을 하며 지낸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는 해가 진 후 예루살렘 구 성곽 밖을 행렬한다.

 

마르 13,1-2 성전의 파괴를 예고하시다 (마태 24,1-2 ; 루카 21,5-6) :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에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말하였다. “스승님, 보십시오. 얼마나 대단한 돌들이고 얼마나 장엄한 건물들입니까?” 2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너는 이 웅장한 건물들을 보고 있느냐? 여기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지고 말 것이다.”

 

 

로마 콜로세오 옆에 있는 티투스 황제의 개선문에는 예루살렘 대성전에서 황금 제대, 은 나팔, 금으로 된 일곱 촛대(메노라)를 전리품으로 가져가는 장면이 부조되어 있다. 예루살렘을 빠져 나간 일부 유다인들도 사해 남서쪽에 헤로데가 만든 천연 요새 ‘마사다’로 퇴각하여 최후까지 항쟁하다가 결전의 날에 모두 자결함으로써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한다. 

 

그 후 예루살렘은 바르 코크바(Bar Kokhba)가 이끄는 2차 유대 항전(132-135년)이 일어나지만 실패하고 하드리아누스 황제(Hadrianus, 117-138 재위)의 군대에 의해 예루살렘은 완전히 파괴 되었다. 2차 유대 항전을 진압한 하드리아누스는 티투스가 했던 것처럼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을 완전히 추방했고, 1년에 딱 한번 히브리 달력으로 아브 달 9일에 성전의 파괴를 애도한다는 목적으로만 입성을 허락했다. 이때부터 유다인들은 예루살렘 시가지 안에 얼씬도 못 하게 되었고 이때부터 유대인들은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될 때까지 나라 잃은 민족이 되어야 했다. 하드리아누스는 할례를 금지키셨고 유대인들의 명절을 지키는 것, 유태교로 개종하는 것, 토라 설교, 랍비의 임명을 금지했으며 할례를 한 사람이 예루살렘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다.

 

예루살렘 시가지에는 로마의 신전과 광장들이 들어서고 점차로 로마 양식으로 변모되었다. 성전 터에는 주피터 신전이 들어섰으며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가족명인 엘리우스(Aelius)와 로마의 수호신 카피톨리누스(Capitolinus)의 이름을 따서 예루살렘은 이제 이름마저 빼앗긴 로마의 식민지 도시 ‘엘리아 카피톨리나(Aelia Capitolina)로 부르게 되었다.

 

그 후 콘스탄티누스 황제(306-337년 재위)에 의해 예루살렘뿐만 아니라 팔레스티나 전 지역이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게 되었다(325년). 로마 신전과 석상들은 허물어지고 예수님과 제자들의 발자취가 담긴 유서 깊은 곳에 기념 성전들이 곳곳에 세워지게 되었다. 유다인들은 이때부터 예루살렘에 자유로이 드나들 수가 있었다. 로마의 승리 이후 비잔틴 시대가 되면서 300년에 걸친 그리스도교 통치시대가 이어졌다. 이 기간 중 비잔틴 황제들은 예루살렘에 교회와 수도원을 수도 없이 지었다.

 

그러나 기원 후 614년 봄, 페르시아 사산 왕조 호스로우 2세(Khosroes II)가 파견한 페르시아 군은 예루살렘을 함락시킴으로써 그 화려했던 비잔틴 시대는 기울기 시작하였다.

성당들은 털리고 불태워졌으며, 수도원들은 파괴되고 사제들과 신자들이 발견되는 대로 학살되었다. 특히 예수님께서 못 박혔던 십자가마저 빼앗기고 말았다. 조르아스터교를 믿는 페르시아군은 베들레헴에 있는 예수님 성탄 성당(동방박사가 예수님께 예물을 봉헌하는 벽화가 페르시아 인들의 복장을 하고 있어서 화를 모면했다고 한다)을 제외하고는 골고타와 예수님 무덤 위에 지어진 예수님 부활 성당을 포함하여 모든 성당들이 파괴 되었다. 그러나 페르시아인들의 통치는 오래가지 않았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소중한 예수님의 유물인 십자가를 되찾기 위해 비잔틴 황제 헤라클리우스는 기원 후 622년에 메소포타미아 깊숙한 곳까지 침공하는데 성공하게 된다. 627년에는 페르시아의 수도 니네베를 정복하자 페르시아인들은 시리아나 팔레스타인, 이집트 뿐 아니라 메소포타미아 일부까지도 다시 돌려주는 평화 안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비잔틴 제국은 630년에 예루살렘을 회복하고 성 십자가도 되찾게 되었다. 그러나 불과 8년 만인 638년에 무슬림들은 10개월간의 공방 끝에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그 이후 십자군이 1099년에 예루살렘을 탈환할 때 까지 460년 동안 예루살렘은 무슬림들의 수중에 놓이게 되었다.

 

638년 칼리프 우마르(Umar)는 예루살렘을 점령했다. 638년 이후 이제 예루살렘은 무슬림들의 도시로 변모되어 많은 기념 성전들이 파괴되거나 아니면 이슬람 사원으로 바뀌게 되었다. 팔레스티나의 새 주인이 된 우마르는 그리스도교 총대주교와 함께 솔로몬의 성전과 헤로데의 성전이 있었던 성전 산을 방문하였는데 페르시아인들이 파괴하여 무너진 돌들로 막혀 안으로 들어갈 수 없자 손수 앞에 있는 돌들을 치워가며 겨우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유대교에 대한 경멸의 표시로 유대인들에게 가장 신성한 곳에 쓰레기를 쌓아 놓은 것을 보고 즉각 쓰레기들을 치우도록 했다고 한다.

 

 


 

3. 바위 돔 사원(Dome of the Rock)

 

팔레스티나를 정복한 이슬람은 예루살렘의 솔로몬의 성전 자리 위에 이슬람 사원인 ‘바위 돔 사원’을 지었는데 유대인들의 전승에 의하면 아브라함이 아들 이사악(대부분의 무슬림들은 이사악이 아니라 이스마엘이라고 믿고 있다)을 제물로 바치려던 바위이다. 이 바윗돌의 크기는 길이가 약 18m, 폭이 13m, 높이는 1.25-2m 가량 된다.

 

바위돔 사원이 있는 성전터의 항공사진.... 서쪽 통곡의 벽이 보이고, 통곡의 벽 오른쪽으로 보이는 통로는 무어족의 문으로 들어가는 비이슬람들을 위한 입구이다.

유대인들은 토라법에 의거해서 성전산 지역에 들어가는것이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다. 

성전산에 들어가는 입구...무어족의 문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고고학 발굴을 위해 최근에 통로로 만들었다. 

성전산에 들어가기 위한 검문...엑스레이 검사까지... 

 

무어족의 문으로 들어가기 전 오른쪽 서쪽 벽을 바라보고...오른쪽 지역은 고고학 발굴 장소이다. 

무어족의 문으로 들어가는 입구 

 

붉은 글씨는 바위돔 사원에 들어갈 수 있는 출입문이다. 비이슬람 신자는 11번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고 나가는것은 어느 문이나 상관없다. 1.지파문(Tribes Gate) 2..히타문(Hittah Gate)  3.화이잘왕문(King Faisal Gate)  4.과와니마문(Ghawanima Gate)  5.감옥문(Prison Gate)  6.철문(Iron Gate)  7.목화상인문(Cotton Merchants Gate)  8.세정문(Ablution Gate)  9.고리문과 평온문(Chain and Tranquillity Gate)  11.무어족의문(Morocco Gate)  12.이중문(Double Gate)  13.삼중문(Triple Gate)  14.외문(Single Gate)  15.황금문(Golden Gate)

 A.바위돔 사원  B.다윗법정(쇠사슬사원) C.설교단  D.요셉의돔  E.문법돔(Grammar Dome)  F.모세의돔  G.이집트 마멜룩크 샘  H.가브리엘돔  I.무함마드 승천기념돔  J..헤브로니테의돔  K.엘리야의돔  L.무함마드가 유대인과 그리스도인들에게 설교했다는 곳(Dome of the Sprit)  M.솔로몬의돔  N.파샤의돔  O.슐레이만샘  P.샘(엘 카스, El-Kas)  Q.엘 악사사원(El-Aqsa)  S.여자들의 사원  R.이슬람박물관  T.솔로몬마구간(지하)  U.안토니아요새  *.예수님이 유혹 받으신 곳

 

  

중앙에 황금 돔이 보이는 것이 바위돔 사원이며, 왼쪽 아래에 있는것은 알 악사 사원. 그리고 아래 오른쪽은 솔로몬의 마구간 자리이다. 

 

661년 시리아와 팔레스티나 지역의 새로운 통치자가 된 칼리프(caliph, 이슬람의 종교 ․ 정치 지도자에게 주어지는 옛날 명칭) 무아위야(Muawiya)는 바위돔 사원의 건축을 계획하였고 칼리프 아브드 알 말리크(Abd al-Malik, 685-705 재위) 때인 691년에 완공되었다. 칼리프 알 말리크는 이 사원을 짓기 위해 이집트에서 들어오는 7년 동안의 국고 수입에 맞먹는 돈을 이 사원의 건립에 썼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사원의 정화 예식을 몸소 거행하여, 직접 손으로 바닥을 쓸고 닦았다고 하며, 그 때문에 그 후의 모든 칼리프들은 똑같은 예식을 해야만 했다고 한다.

 

칼리프 말리크는 685년에 그리스인 건축가, 아르메니아인 장인과 더불어 시리아인 인부들을 고용하여 아브라함이 제사를 지낸 자리 위에 비잔틴 양식으로 8각형의 기념 건물을 웅장하게 지었는데, 그리스도교를 대표하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건축한 예수님 부활 성당을 모방 했지만 그보다 더 크고 화려하게 만들었다. 나무로 된 돔은 지름 18m로 높은 ‘원통형 구조물’ 위에 얹혀 있으며 그 밑은 16개의 기둥이 둥글게 배열되어 있다. 이 원을 둘러싸고 24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진 8각형 아케이드가 있다. 외벽도 마찬가지로 똑같은 8각형이며 각 면은 대략 너비가 18m이고 높이가 11m이다. 바위돔 사원은 수학적 ․ 기하학적으로 완벽한 균형을 이루고 있는 이슬람이 예루살렘에 남긴 최고의 걸작이며 현존하는 이슬람 사원 중 가장 오래된 사원이자 아직도 가장 웅장한 사원이다. 이 사원은 돔을 이루는 둥근 틀은 납과 금으로 만들어졌으며, 겨울에는 동물의 가죽을 그 위에 덮어 예루살렘의 매서운 겨울바람 속에 얼어붙는 것을 방지했다고 한다.

 

8은 7+1이라는 의미에서 옥타브를 나타내는 숫자, 재출발을 상징한다. 8은 낙원의 회복, 재생, 부활, 지복, 완전한 리듬의 상징이다. 단식과 참회의 7일간이 끝나고 8일째는 풍요와 신생의 날이다. 동서남북의 4가지 기본 방위에 각각의 중간 방위를 다하면 8개의 방위가 되며, 입체성을 상징한다. 불교는 여덟 가지 상서로운 상징과 특히 깨달음에 이르는 팔정도로 유명하다.

 

솔로몬 성전의 중심이었던 거룩한 바위 위에 바위 돔 사원을 지으면서 그리스도교의 예수님 부활 성당의 돔보다 더 높고 웅장하게 만든 이유는 이슬람이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기반 위에서 탄생 했지만 이 두 종교를 최종적으로 완결하는 종교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중간에 높은 종탑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성지관구 본부 수도원 종탑이며 그 왼쪽에 둥글게 두개가 있는것이 예수님 무덤 성당의 돔이다. 왼쪽 큰것이 무덤 위의 돔. 성전산 남쪽에서 본 정경

성전산 북쪽에서 바라본 예수님 무덤 성당의 돔

 

그리고 팔레스티나와 시리아 등 아랍권에서 온 이슬람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성대한 그리스도교 성당들을 보고 그들의 신앙이 흔들리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알 말리크는 돔 내부의 천장 벽에 꾸란 중에서도 반 그리스도교적인 구절들을 인용하여 새겨 놓았다. 그렇게 새긴 글은 길이가 240m나 되며 현존하는 이슬람 글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것인데, 그리스도가 신의 아들이란 것과 삼위일체설 등을 비난하는 구절들과 비잔틴식 모자이크로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다.

 

바위돔 사원의 단면도 : 1.남쪽 문  2.서쪽문(출입문)  3.북쪽문  4.동쪽문  5.다윗법정(쇠사슬 돔)  6.아브라함이 이사악을 제물로 바친 바위  7.무함마드의 수염과 유물이 보관된 탑  8.지하 동굴로 내려가는 입구  9.미흐랍(mihrab, 메카의 방향을 지시)

 

 

 

바위돔 사원이 무슬림들에게 있어서 빼 놓을 수 없는 소중한 성지가 되는 것은 무함마드가 이 거룩한 바위에서 알라의 마지막 계시를 받기 위해 천국에 다녀왔다는 전승 때문이다.

 

꾸란 17,1 자비로우시고 자애로우신 하느님의 이름으로 : 하느님의 종을 밤중에 하람사원에서 아크사 사원으로 밤하늘 여행을 시킨 그분께 영광이 있으서소. 그곳은 하느님이 축복을 내린 이웃으로 하느님의 일부 표적들을 보여주고자 함이라 실로 하느님은 들으시며 지켜보고 계시니라.

 

예루살렘 성전이 무슬림 사원으로 탈바꿈한 지 수년이 지난 뒤, 사람들은 이 바위 돔 사원이 무함마드가 메카에서 날아와 아크사 사원(al-Aksa)으로 옮겨졌다가, 신의 마지막 계시를 받으러 하늘로 올라갔다는 꾸란 말씀의 그 장소라고 믿게 되었다. 여기서 ‘하람사원’은 사우디아라비아 메카에 있는 카바 신전을 말하며, 아크사 사원은 예루살렘 모리야 산 위에 있는 솔로몬 사원 지역을 말한다. 아크사 사원은 ‘먼 곳의 사원’으로 번역되는데 최근 학자들 연구에 의하면 그곳은 예루살렘이 아니라 메카 근처에 있는 알지라나(al-Jiranah)란 작은 마을로 630년경 무함마드가 잠시 머물렀던 곳이라고 한다.

 

바위 돔 사원이 완공된 뒤, 무함마드의 40일간의 밤 여행은 더욱 화려하게 각색되었는데 천사 가브리엘이 인도하는 가운데, 부라크(Buraq-번개라는 뜻. 여자의 얼굴과 공작의 꼬리를 가진 말)라는 이름을 가진 백마를 타고 메카에서 예루살렘으로 하늘을 날아왔으며 그 중간에 모세와 다윗에 대한 경의의 표시로 시나이와 베들레헴에도 들렀다고 한다. 그는 모리야 산의 바위에서 하늘로 날아가기 전에 부라크를 성전 서쪽 벽(유대인들의 통곡의 벽)에 묶어 두었는데 그 이후로 서쪽 벽은 무슬림들에게 부라크라 불리기 시작했다. 무함마드는 천사 가브리엘의 안내를 받아 빛으로 된 사다리를 타고 하늘에 올랐으며, 아담, 아브라함, 모세, 솔로몬, 세례자 요한, 예수 등을 모두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일곱 개의 하늘을 지나 알라를 만나서 최후의 계시를 들었다고 하는데, 그 중엔 무슬림들이 해야 할 기도 방법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는 하늘에서 다시 모리야 산 바위로 내려와, 부라크를 타고 새벽이 되기 전에 메카로 돌아갔다. 무함마드의 승천 이야기는 중세 유럽 문학 특히 시인 단테(Dante)의 신곡(Divine Comedy)에서 ‘천국 편’의 모델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올리브 동산에서 바라본 예루살렘 대성전의 바위돔 사원.

 

 

 

  

 

 

 

 

 

  

 

 

   

  

638년에서 750년까지 100년도 넘게 예루살렘은 수니파인 우마이야 가문이 다스렸다. 이 성전을 지은 칼리프 말리크는 성전을 지으면서 이슬람력 72년(기원후 691년)에 완공했다는 것을 성전 내부에 기록 했는데 이후 이라크 및 이란의 시아파 무슬림의 지지를 등에 업은 아바스 가문으로 정권이 바뀐 후 모든 이슬람 건물에서 우마이야조 칼리프들의 이름이 다 지워지고 아바스 칼리프들의 이름으로 바꾸었다. 성전이 완공 된 후 200년이 지난 후 아바스조의 알 마문(al-Mamun, 813-835년 재위)은 알 말리크의 이름을 지우고 자신의 이름으로 대체했는데 건물 안에 새겨진 완공 일자를 바꾸지 않아 그의 거짓말이 들통 나게 되었다.

 

바위돔 사원은 수세기에 걸친 여러 번의 지진이 있었고 1016년에 무너졌다. 그 후 1319년 맘루크 칼리프 안 나시르 무함마드(An Nasir Muhammad)에 의해 재건축이 되어 우리가 오늘날 보는 모습이 되었다.

 

16세기 베네치아에 있는 마르코 대성당의 모자이크에 영향을 받은 무슬림 장인들은 바위 돔 사원의 둥근 지붕 겉면을 페르시아 자기로 된 타일로 장식했는데, 이 타일들은 노랑, 녹색, 검은색, 청록색 등 가지각색이며 그 기하학적인 꽃무늬 도안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이슬람 예술의 정수는 바로 둥근 지붕의 안쪽 표면인데, 색깔과 도안이 둥근 표면 전체에 고르게 박혀 있어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또한 건물의 안팎 벽면에는 ‘꾸란’의 말씀이 고대 아라비아 문자로 새겨져 있다. 건물의 안쪽은 갈색 줄무늬가 있는 백색 대리석 기둥으로 받쳐지고 있으며, 그 기둥의 꼭대기에는 금박으로 된 비잔틴식 무늬가 있다. 팔면의 벽체 중 동서남북의 사면에만 출입문이 있다. 각 벽에는 화려한 모자이크 창으로 만들어진 대형 창문들은 부드럽게 빛을 받아들이면서 둥근 중앙 경배실 안의 신성함을 더해준다.

 

 

 

 

 

 

 

 

 

 

 

 

 

 

 

 

 

 

 

 

 

 

 

 

 

돔은 아브라함의 모리야 산 바위이자 무슬림 전통에 의하면 무함마드가 하늘로 날아간 곳이기도 한 바위를 품고 있다. 이 바위는 울퉁불퉁한 석회암이 아무렇게나 돌출한 모양을 하고 있어, 주변의 찬란한 구조물들과 대조되어 보이는 이 바위는 마치 하늘에 매달려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주는데 그 때문에 재미 있는 전설이 생겨났다. 무함마드가 하늘로 날아갈 때 이 바위도 그를 흠모하여 따라가려 했지만, 무함마드의 안내를 맡았던 천사 가브리엘이 손으로 바위를 눌러 다시 돌려놓으며 "바위야, 너의 자리는 이곳 세상이다. 예언자 무함마드의 에덴동산에는 네가 있을 자리가 없다”고 외쳤다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그 바위 위에는 천사 가브리엘의 손자국과 무함마드의 발자국이 남아 있다. 그 옆의 탑 속에는 무함마드의 수염과 유물이 보관되어 있는데 일 년에 단 한번 라마단의 27일째 되는 날 공개된다. 이 날은 천사가 내려와 무슬림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날이라고 한다.

 

바위가 공중에 떠 있다는 믿음은 만일 이 바위가 땅에 떨어지면 바로 그 날에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아가 올 거라는 이야기는 황금문의 전설처럼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아가 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오스만 투르크 정부는 바위가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보조 받침대를 세웠다고 한다.

 

이 신비한 바위 아래에는 동굴이 하나 있는데, 이 동굴은 무슬림들에겐 무함마드가 하늘에 다녀오기 전 기도를 바친 곳이라고 하여 특별한 경배의 대상이다. 동굴 천장 위에 조금 푹 들어간 곳은 무함마드가 기도 중에 머리를 기댔던 곳이라고 한다. 바위 밑에는 동굴이 하나 있는데 아브라함, 다윗, 솔로몬, 엘리야 그리고 무함마드가 야훼 하느님께 기도를 했던 곳이라고 한다.

 

바위 밑에 있는 ‘영들의 샘’에는 죽은 영혼들이 모여 심판의 날을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무슬림과 유대인들은 하늘의 천국과 땅속의 지옥을 나누는 세상의 중심점이 그리스도인들의 주장처럼 예수님의 무덤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바위 돔 사원 내부의 반석 밑에 있는 이 우물의 윗부분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이 우물은 ‘이 세상의 모든 연못과 샘에 물을 대주는 근원’이라고 한다.

바위 주위로는 두 개의 폭 넓은 회랑이 있어 메카에 가서 검은 돌인 카바 주위를 도는 의식을 할 수 없는 무슬림들이 여기에서 바위 주위를 돌며 기도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바위 돔 사원은 메카에 있는 카바, 메디나에 있는 예언자 무덤과 함께 이슬람교도들에게는 3대 성지 중 하나다. 알라는 여호사팟 계곡으로 통하는 예루살렘 동문 밖에서 최후의 심판이 있을 것이며, 메카와 메디나가 충성스런 종복처럼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와서 신에게 경배하는 기적이 일어날 것이라고 했다. 최후 심판 때는 이 바위 꼭대기에서 심판의 나팔소리가 울려 퍼질 것이고, 알라 신은 바로 이 바위에 나타나실 것이라고 그들은 믿고 있다.

그리고 수세기에 걸쳐 시리아 및 팔레스타인에 사는 수많은 무슬림들이 메카까지 가는 의무적인 순례여행(하즈-Haji, 모든 성인 무슬림들이 성도인 메카를 일생에 적어도 한번은 순례해야 하는 다섯 번째 의무) 대신 바위 돔 사원을 찾는 바람에 예루살렘은 그 신성함을 더하게 되었다.

 

바위돔 사원이 있는 성전 뜰은 주위보다 3m 더 높게 만들었고, 성전 뜰로 올라가는 계단은 사방에 8개가 있고 각 계단 위에는 아치로 장식되어 있다. 무슬림들은 최후의 심판 날에 이 아치 사이에 모든 인간들의 선과 악을 재기 위해 저울들이 드리워질 거라고 믿으며 그래서 이 아치를 ‘저울’이라고 부른다.

 

 

올리브 동산을 바라보고...성전 동편에 있는 아치 

성전 남쪽 알 악사 사원을 바라보고... 

 

성전 북쪽 동편쪽 아치 

성전 북쪽 서편쪽 아치  

 

 

 

 

 

다윗의 법정

 

바위돔 사원 바로 동쪽 편에는 ‘쇠사슬 사원’(Dome of the Chain)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다윗의 법정’이 있다. 이 사원은 바위 돔 사원을 축소해 놓은 듯 한 구조를 하고 있는데 바위돔 사원을 지은 칼리프 아브드 알 말리크에 의해 지어진 것으로 바위 돔을 짓기 위한 모델이었다는 주장도 있고, 또 바위 돔 사원의 금고 역할을 했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두 건축물간 어떤 특별한 관계는 없다고 한다.

 

 성전 동편에서 바라본 정경. 앞쪽에 있는것이 쇠사슬 돔이고 뒤쪽이 바위돔 사원

 

 

 

다윗 법정...쇠사슬 돔의 돔 내부 모습

 

 

 

 

메카 방향을 알려주는 쇠사슬 돔의 미흐랍 

 

흥미로운 것은 무슬림들의 전승에 의하면 이 자리에 쇠사슬이 드리워져 있었는데 다윗 왕이 재판을 할 때 누가 거짓말을 하면 쇠사슬이 떨어졌다고 한다. 무슬림 전승에 의하면 바로 이곳에서 최후의 날 최후의 심판이 일어날 것이며 죄인들은 남고 정직한 사람들만이 통과할 수 있을 거라고 한다.

십자군 시대인 1099년에는 바로 이곳에서 야고보 성인이 순교를 했다고 하여 야고보 성인에게 봉헌한 경당으로 바꾸기도 했었다. 20개의 대리석 기둥이 지탱하고 있는 이 돔은 성전 산(Temple Mount)의 배꼽이자 지구의 배꼽이라고도 한다.

 

 

알 악사 사원을 등지고 바위돔 사원을 향하여 계단을 올라가면 아치 왼쪽에 야외 설교단(민바르, Minbar)가 있다.

 

 

  

 

 

 

 

 

민바르 서편에 있는 작은 건물은 ‘요셉의 돔’이며 1911년에 건축되었다. 요셉의 돔 서편에는 1207년에 지어진 이슬람 도서관이다.

요셉의 돔

요셉의돔 옆에 있는 1207년 Ayyubid 기간에 만들어진 문법돔(Grammar Dome)이다.

 

  

성전 서북쪽 가까이에 있는 돔은 무함마드를 하늘로 인도한 가브리엘 천사를 기념해서 1538년에 지은 ‘가브리엘 돔’이다.

 

 

그 옆에 있는 ‘무함마드의 승천기념 돔’은 1200년에 지어진 것으로 꼭대기 장식이 아름답다. 이 돔은 십자군 시대 예술을 볼 수 있는 좋은 본보기 인데 바위돔 사원이 성당으로 개조되어 사용될 때 세례대로 만들어진 건물이다. 꼭대기 장식과 돌 기둥들의 장식은 십자군 시대의 작품이다.

승천돔 기둥 장식 

승천돔 기둥 장식

승천돔 꼭대기 장식

 

19세기에 지어진 헤브로니테의돔으로 현재는 알악사 사원과 바위돔 사원의 복원 위원회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다.

 

바위돔 사원 성전 북서쪽 모서리에는 16세기 오트만 투르크 시대에 만들어진 알 카드르돔(Dome of Al-Khadr)이 있다. 엘리아의 돔이라고도 한다. 

 

 

엘리야의 돔 옆에 있는 ‘영들의 돔’(Dome of the Spirit)은 무함마드가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에게 설교를 했다는 전설의 돔이다. 16세기 오트만 투르크 시대에 지어졌다.

 

성전 북쪽 출입구인 화이잘 왕의 문 근처에 있는 파샤의 돔 

 

 

파샤의돔 뒤쪽에 있는 슐레이만 샘

 

 

슐레이만 샘 왼쪽에 있는 솔로몬의 돔 

  

바위 돔 사원으로 들어오는 출입문은 모두 15개가 있는데 성전 북쪽에 3개, 서쪽에 8개 있다. 서쪽에 있는 출입문 중 바위 돔 사원 서쪽에 있는 ‘목화 상인 문’이 아름답다.

 

성전 동쪽으로 유일하게 나 있는 황금문(Golden Gate)은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아가 이 문을 통해서 들어오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오스만 투르크 정부에 의해 봉쇄 되었다.

 

성전 동편에 있는 황금문. 예수님께서 성지주일에 들어 가셨던 문이다. 오스만 투르크인들은 메시아가 다시 황금문으로 들어가면 제국이 멸망한다는 전승을 두려워 한 나머지 이 문을 막아버리고 말았다. 유대인들도 심판의 날이 되면 착한 사람은 남쪽문(자비의 문)을 통해 하늘나라에 들어갈 것이요, 악한 사람들은 북쪽문(후회의 문)을 통해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성전 남쪽에는 이중문과 삼중문 그리고 외문이 있었는데 이중문은 비잔틴 시대 이후 막혔고 삼중문은 솔로몬의 마구간으로 통하는 문이었는데 십자군 시대까지 사용되다가 그 후 막혔다. 이중문과 삼중문은 헤로데 대왕이 만든 것으로 이 둘을 합쳐 훌다문이라고 했다.

 

 

고리문(Chain Gate) 근처에 있는 건물은 1251년에 만들어진 ‘모세의 돔’이다.

 

세정문(Ablution Gate) 근처에 있는 'Kaytbay's 샘'. 1482년 마멜룩크(Mamluk) 시대에 만들어졌다.

 

성전 서편 세정문(Ablution Gate) 근처에 아름다운 샘이 있는데 이것은 1482년 이집트 마멜룩크(Mamluk)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마멜룩크 예술의 정수를 볼 수 있는 샘이다.

 

 

 

 

 

‘무어족의 문’(Morocco Gate) 남쪽에 있는 건물은 북부 아프리카인 무어족을 위한 회교 사원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회교 박물관이라고도 한다. 그 건물 동쪽은 여자들을 위한 회교 사원이다.

 

 

알 악사 사원

예루살렘 대성전 남쪽 부분에 위치한 알 악사(al-Aksa) 사원은 황금 돔인 바위 돔 사원과 비교하여 ‘은색의 돔’(The Silver Dome)이라고도 하는데 꾸란 17장 1절에 나오는 무함마드의 밤 여행에서 이름을 따 ‘가장 먼 사원’을 의미하는 ‘알 악사’에서 유래하였다.

 

무어족 문을 들어서서 바로 왼쪽에 있는 회랑...이 회랑쪽이 통곡의 벽쪽이다.  

무어족 문을 들어서서 바로 왼쪽에 있는 회랑 내부 모습...왼쪽 벽 아래가 통곡의 벽

무어족문을 들어서서 바로 오른쪽에 있는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는 건물.  

알 악사 사원의 돔...왼쪽으로 보이는 벽면은 알 악사 사원의 서쪽편... 

알 악사 사원의 정문 모습 

 

알 악사 사원의 동편과 정문쪽  

알 악사 사원의 동편

알 악사 사원의 정문 현관 위쪽 

솔로몬의 마구간 쪽...저 멀리 보이는 곳은 올리브 산 정상... 

솔로몬 마구간으로 내겨가는 계단...왼쪽 성벽은 성전 동편이다.

  

이 사원은 한때 유다 왕들의 궁전이 자리했던 곳이었고, 비잔틴 유스티아누스 황제가 지었던 성모 마리아 성당 자리 위에 칼리프 알 왈리프(al Walif)가 709년에 시작하여 715년 완공한 가로 90m, 세로 60m의 수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규모 사원이다. 이 사원은 746년과 780년 두 번에 걸친 지진으로 파괴되었다가 780년 압바시드 왕조의 칼리프 알 마흐디(al-Mahdi)가 15개의 측랑과 280개의 주랑을 가진 사원으로 재건했다. 1033년 또다시 지진으로 일부 파손된 후 파티미드 왕조의 칼리프 아즈 자히르(az-Zahir)가 재건할 때는 일곱 개의 측랑만 남았다. 현재는 사원 정면의 문이 7개뿐이지만 처음에는 15개였다고 한다. 이 사원을 짓게 한 칼리프는 알 왈리드(al-Walid)로서 알 말리크의 아들이었는데, 그는 이 사원뿐 아니라 메디나에도 중앙 사원을 세우고, 다마스쿠스 및 카이로에도 대형 사원을 건립하는 등 왕년의 헤로데 왕에 버금가는 건축에 대한 열정을 보인 사람이었다. 이 사원은 완공된 뒤에 예루살렘 최대의 무슬림 집회소가 되었다.

 

1099년 십자군이 이곳에 왔을 때 그들은 십자가와 제단을 더하여 바위 돔 사원을 ‘주의 성전’(Templum Domini)으로 바꾸고 알 악사 사원은 ‘솔로몬의 성전’ 이라고 이름으로 바꾸었다. 사원의 일부를 개조해 ‘성전에서의 예수 봉헌’(루가 2,22) 기념 경당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그 후 1131년에는 템플기사단에게 넘어갔다. 1187년에 무슬림은 다시 이곳을 되찾았으며 살라딘은 십자군들의 흔적을 없애고 다시 이슬람 사원으로 만들었다.

14세기경에 보수가 있었고, 1938년-1942년에 보수 및 재건되었으나 1969년에 정신 착란증 환자 데니스 마이클로한이라는 호주 출신 청년에 의해 목조로 된 설교단인 민바르와 은색의 둥근 지붕 상당부분이 불에 타 파손되었다.

 

 

엘 악사 사원과 바위 돔 사원의 사이에는 컵을 뜻하는 알 카스(al Kas) 샘이 있다. 이 샘은 무슬림들이 기도하기 위해 사원에 들어가기 전에 손과 발을 씻는 곳이다.

 

사진 아래쪽 둥글게 있는 것이 알 카스 샘 

 

이슬람 사원에 들어가기전 손과 발을 씻는 수도 

 

 

 

 

성전 동남쪽 끝부분은 솔로몬의 마구간이라고 부르는 곳이다. 솔로몬 시대에는 이 곳 근처에 마구간이 자리했다(2열왕 11,16; 느헤 3,28)고 하는데 헤로데 대왕이 성전 뜰을 확장할 때 길이 83m 넓이 60m가 되는 넓은 방으로 1.2m의 돌기둥 88개 받치고 있는 아치이며 십자군들이 마구간으로 사용했던 것을 현재는 복원하여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하고 있다.

 

 

사원 일대의 드넓은 공간에는 삼나무와 올리브 나무로 이루어진 자그마한 숲이 몇 개 있어 땀을 흘리고 지친 사람들에게 그늘을 마련해 준다. 사원 내에는 무슬림들이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바라보는 또 다른 나무는 그 잎사귀가 악마의 눈길을 피하게 해준다고 전해오는 키 큰 사시나무다. 일찍이 솔로몬 왕이 처음으로 이 나무를 심어 거룩한 성전을 보호하려 했다고 한다.

 

 

 

 

 

멀리 올리브 산 중턱에 러시아 정교회의 마리아 막달레나 수도원이 보인다. 

 

 

예루살렘을 수복한 십자군은 바위 돔 사원을 교회로 바꾸고 ‘주님의 성전’(Templum Domini)이라고 불렀다. 알 악사 사원은 1104년에 라틴 예루살렘 왕국의 볼드윈 1세(Baldwin I)의 왕궁이 되었다. 바위 돔 사원의 돔 위에 놓인 초승달은 항상 남쪽의 메카 방향을 가리키는데 메카가 아닌 다른 방향을 가리키면 이는 재앙이 일어날 징조라고 무슬림들은 믿는다. 십자군들은 예루살렘을 정복한 후 그 초승달을 십자가로 바꿔 놓았지만 1187년 10월 살라딘이 탈환한 뒤 황금으로 만든 초승달을 원래의 위치에 남쪽 방향으로 다시 달아 놓았다. 그 이후 1855년까지 그리스도인들은 성전 출입이 금지 되었다.

 

사원은 마흐무드 2세(Mahmud II)가 통치하던 1817년에 대대적인 보수를 하였고, 그 후 영국이 위임 통치하던 1927년 7월 11일 바위 돔 사원은 지진으로 다시 심하게 훼손 되었다.

1955년 아랍 정부와 터키 정부의 기금을 받아 요르단 정부에 의해 보수 작업을 하였다. 그리고 1960년에는 이태리에서 만든 내구성이 좋은 알루미늄과 청동 합금으로 돔을 복원 하여 1964년에 마쳤다. 1998년에는 요르단의 후세인 왕이 런던에 있는 자신의 집을 팔아서 8.2 백만 달러를 기부하였고, 80kg의 금을 들여 황금 돔으로 복원하였다.

 

예루살렘 구시가지가 요르단에 의해 통치되고 있을 때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구시가지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지만 1967년 6일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승리한 후 이스라엘의 통제 하에 있다.

 

2000년 이스라엘 극우 리쿠드당 당수였던 샤론(Ariel Sharon)은 총선이 있기 직전 전격적으로 알 아크사 사원을 방문함으로써 제2차 인티파다(Intifada, 이스라엘의 지역 점유 및 정책에 반대하여 가자지역과 웨스트뱅크 지역에서 일어난 반 이스라엘 주의)가 일어나 수천 명이 죽는 유혈 참사의 빌미가 되었다.

 

인티파다 후 이슬람 신자가 아닌 사람들에게 성전 경내 출입은 금지되다가 2006년에 다시 개방되었지만 바위 돔 사원과 알 아크사 사원 안에는 출입할 수 없게 되었다. 성전 경내는 금요일과 특별한 날을 제외하고 오전 7:30-11:30 그리고 오후 1:30-2:30(여름), 겨울에는 오전 7:30-10:30 그리고 오후 1:30-2:30까지 개방된다. 일반인들은 통곡의 벽 옆에 있는 ‘무어족의 문’(Morocco Gate)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는데 유대인의 기도책이나 성경의 반입은 금지된다. 나갈 때는 아무 문이나 관계없다. 특별히 유대인들은 유대인 랍비에 의해서 대사제만이 들어갈 수 있는 지성소의 자리를 혹시라도 밟을 수 있는 위험성 때문에 대성전 안의 출입은 엄격히 금지되고 있다.

 

 

예루살렘 성전은 갈릴래아에서부터 시작된 예수님의 마지막 여정이었다. 예루살렘은 어린 소년 예수가 12살 때 파스카 축제를 지내러 부모님과 함께 올라갔다가 율법 학자들과 토론한 곳이며,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기적을 행하셨으며 마지막 날이 다가오자 성대한 입성을 하시고 장사꾼과 환전상들을 쫓아내고 정화 하셨던 바로 그곳이었다.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시며 눈물을 흘리셨던 바로 그곳!

 

황금빛의 바위 돔 사원을 뒤로 하고 올리브산 중턱에 있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심을 기념 하는 기념 성당을 바라보면 마치 눈물 가득한 예수님의 눈망울을 보는 것 같이 느껴진다.

 

올리브산 중턱에 있는 '도미누스 플레빗'.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시며 눈물을 흘리심을 기념하는 성당

  

 

주님께서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심을 기념하는 '도미누스 플레빗' 성당의 제대 뒤편으로 바라보이는 바위돔 사원의 황금돔. 십자가 왼편에는 이슬람의 바위돔 사원이 그리고 십자가 오른쪽에는 예수님 무덤 성당의 돔이 보인다.

올리브 동산 정상에 있는 주님의 기도 성당 종탑 

 

올리브 동산에 있는 러시아 정교회 마리아 막달레나 수도원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루카 19,42)

  

 

참고자료 : http://www.youtube.com/watch?v=lFnWTz-7I0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