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르단

느보 산(Mount Nebo)

테오필로 2010. 12. 22. 23:15

 

느보 산

 

1. 성경에서의 느보 산

 

느보 산(Mount Nebo, 아랍어-Jabal Nibu)은 요르단 왕국 마다바 시에서 북서쪽으로 약 10km 정도 떨어져 있으며 파이사리야(Faysaliyah) 마을 근처에 있다. 트랜스요르단 고원 서쪽 끝자락에 위치한 느보 산은 3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는데 835m의 니바(Ras al-Niba) 봉우리가 가장 높고 두 번째는 무카야트(Khirbetel-Mukhayyat) 봉우리가 790m 그리고 역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산인 시야가(Ras Siyagha) 봉우리가 710m 높이 이다.

 

 

 

1.마다바  2. 느보 산  3.예수님 세례터  4.예리코  5.쿰란 유적지

 

왼쪽 산 봉우리가 느보 산 성지가 있는 부분이다. 오른쪽은 주차장.

 

 

신명기 마지막 장에서 모세는 ‘피스가 정상에 있는 느보 산’으로 올라갔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히브리어로 피스가(פסגה, pisgah)는 ‘꼭대기’를 의미한다.

신명 34,1 모세는 모압의 평야에서 느보 산으로 올라가 에리코의 맞은편에 있는 피스가의 정상에 있는 느보 산으로 올라갔다.

 

전승에서는 모세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에게 약속된 가나안 땅을 바라보기 위해 오른 느보 산이 바로 세 번째 봉우리인 ‘시야가’ 산이 라고 한다. 실제로 시야가는 가나안 땅을 바라보기에 가장 좋은 천연의 전망대였을 것이다.

느보 산 전망대에 서면 왼쪽으로는 사해의 북단과 서북쪽에 있는 쿰란 유적지가 한눈에 들어오며 정면으로는 요르단 강 양쪽으로 푸르른 농경지가 보이고 요르단 강 너머에는 오아시스 도시인 예리코가 내려다보인다. 요르단 강 계곡과 예루살렘 사이로는 유대 광야가 펼쳐져 있고 동북쪽으로는 요르단의 수도인 암만과 주위 언덕들이 보인다. 매우 맑은 날은 아무런 보조 기구 없이 베들레헴과 헤로데의 요새인 헤로디온의 뾰족한 봉우리와 예루살렘의 올리브 산꼭대기에 있는 건물들을 훤히 바라다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시야가 봉우리이다.

 

모세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바라본 전망대에 설치된 방향판

 

아래 사진의 푸르른 벌판은 요르단강 동편, 요르단 왕국의 땅이다.

 

 

아래 사진 왼쪽 부분에 보이는 것은 사해 북단이다.

 

흐린 날씨라서 확연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사해 북단에 있는 쿰란 유적지를 바라보고 찍은 사진이다.

 

예리코를 바라보고 찍은 사진.

 

느보 산 아래의 베두인 텐트

 

 

 

모세는 하느님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인들의 손에서 구해 내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이끌라는 소명을 받았다.

 

탈출 3,8-10 그래서 내가 그들을 이집트인들의 손에서 구하여, 그 땅에서 저 좋고 넓은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족과 히타이트족과 아모리족과 프리즈족과 히위족과 여부스족이 사는 곳으로 데리고 올라가려고 내려왔다. 이제 이스라엘 자손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나에게 다다랐다. 나는 이집트인들이 그들을 억누르는 모습도 보았다. 내가 이제 너를 파라오에게 보낼 터이니,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어라.

 

느보 산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 종살이에서 이끌어 내어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과 계약을 맺으시고 40년간의 광야 생활을 거친 후 도달한 출애굽 여정의 마지막 장소였다. 모세가 느보 산 피스가 꼭대기에 올라가자 주님께서는 그에게 유다의 온 땅을 눈으로만 보게 하시고 그 땅으로 건너가지 못하게 하셨다. 모세는 백스무 살의 나이었으나 아직 눈이 어둡지 않았고 기력도 없지 않았지만 하느님의 뜻이었기에 이곳에서 생을 마감해야 했다(민수 27,12-14; 신명 32,48-52; 34,1-7).

 

민수 27,12-14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 아바림 산으로 올라가, 내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준 땅을 바라보아라. 그 땅을 바라본 다음에는, 너의 형 아론이 간 것처럼 너도 선조들 곁으로 가게 될 것이다. 이는 친 광야에서 공동체가 시비를 걸어올 때, 그들이 보는 앞에서 물로 나의 거룩함을 드러내라는 내 분부를 너희가 거역하였기 때문이다.” 이 물은 친 광야에 있는 므리밧 카데스의 물을 가리킨다.

 

 

신명 32,48-52 바로 그날에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너는 예리코 맞은쪽, 모압 땅에 있는 아바림 산맥의 느보 산으로 올라가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소유하라고 주는 가나안 땅을 바라보아라. 그리고 너의 형 아론이 호르 산에서 죽어 선조들 곁으로 간 것처럼, 너도 네가 올라간 산에서 죽어 선조들 곁으로 가야 한다. 그것은 너희가 친 광야에 있는 므리밧 카데스 샘에서, 이스라엘 자손들 한가운데에서 나를 배신하였고, 이스라엘 자손들 한가운데에서 나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너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주는 땅을 멀리 바라보기만 할 뿐 들어가지는 못한다.”

 

 

신명 34,1-7 모세가 모압 평야에서 예리코 맞은쪽에 있는 느보 산 피스가 꼭대기에 올라가자, 주님께서 그에게 온 땅을 보여 주셨다. 단까지 이르는 길앗, 온 납탈리, 에프라임과 므나쎄의 땅, 서쪽 바다까지 이르는 유다의 온 땅, 네겝, 그리고 초아르까지 이르는 평야 지역, 곧 야자나무 성읍 예리코 골짜기를 보여 주셨다. 그리고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저것이 내가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너의 후손에게 저 땅을 주겠다.’ 하고 맹세한 땅이다. 이렇게 네 눈으로 저 땅을 바라보게는 해 주지만, 네가 그곳으로 건너가지는 못한다.”주님의 종 모세는 주님의 말씀대로 그곳 모압 땅에서 죽었다. 그분께서 그를 모압 땅 벳 프오르 맞은쪽 골짜기에 묻히게 하셨는데, 오늘날까지 아무도 그가 묻힌 곳을 알지 못한다. 모세는 죽을 때에 나이가 백스무 살이었으나, 눈이 어둡지 않았고 기력도 없지 않았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눈앞에 둔 모세의 심정은 어떠하였을까? 온갖 시련을 겪으며 걸어온 40년간의 여정에 대한 회한은 없었을까?

모세는 주님께 간구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의 뜻이 아니었다.

 

신명 3,23-27 “그때에 내가 주님께 이렇게 간구하였다. 주 하느님, 주님께서는 이제 당신 종에게 당신의 위대함과 당신의 뛰어난 능력을 보여 주기 시작하셨습니다. 하늘이나 땅에 있는 어떤 신이 당신의 업적과 위업과 같은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부디 저를 건너가게 해 주시어, 제가 요르단 건너편에 있는 저 좋은 땅, 저 아름다운 산악 지방과 레바논을 보게 하여 주십시오.’그러나 주님께서는 너희 때문에 나에게 진노하시어 내 말을 들어 주지 않으셨다.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그만 됐다. 더 이상 이 일로 나에게 말하지 마라. 피스가 꼭대기에 올라가서, 서쪽과 북쪽과 남쪽과 동쪽으로 눈을 들어, 네 눈으로 똑똑히 보아라. 너는 이 요르단을 건너지 못할 것이다.

 

성경에 의하면 모세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지 못한 이유에 대해 두 가지 전승이 있는데 그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이 시나이 반도에서 하느님께 반역한 때문이다(신명 1,34-37 참조). 그리고 다른 하나는 모세가 친 광야에 있는 므리밧 카데스 샘에서 하느님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지팡이를 집어 들고 형 아론과 공동체가 보는 앞에서 바위더러 물을 내라고 명령 하라’고 하였는데 모세는 이를 따르지 않고 지팡이로 바위를 두 번 쳐서 물이 터져 나오게 하였기 때문이다(민수 20,1-13 참조).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전승에 따르면 모세는 미카엘 대천사에 의해서 느보 산에 묻혔고 그 장소는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았다(신명 34,6 참조). 비록 오경의 저자는 이스라엘 백성과 모세의 불충함으로 인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으로 전하고 있지만 하느님께서 손수 그의 무덤을 마련하셨다는 것은 모세가 요르단 강을 건너지 못하고 죽는 것이 하느님의 계획임을 말해 주는 것이리라.

 

 

느보 산은 모압 임금 발락이 발라암 예언자를 ‘파수병의 밭’이라고 부르는 피스가 산꼭대기로 데려다가 이스라엘에 저주를 내려달라고 청한 두 번째 장소이기도 하다. 시야가 성당 왼쪽에 있는 둥근 언덕이 발락이 발라암에게 모압 평지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을 향하여 저주를 퍼부어 달라고 요청했던 곳이라고 한다.

 

민수 23,13-14 발락이 그에게 말하였다. “나와 함께 다른 곳으로 가서, 그곳에서 그들을 바라보십시오. 그러나 그들의 끝자락만 보고, 전체는 보지 못할 것입니다. 거기에서 나를 위하여 그들을 저주해 주십시오.”그리하여 그는 발라암을 피스가 산꼭대기, ‘파수병 밭’으로 데리고 갔다. 그는 거기에 제단 일곱을 쌓고, 각 제단에서 황소와 숫양을 한 마리씩 바쳤다.

 

 

 

 

마카베오서에 의하면 예언자 예레미야는 예루살렘 대성전이 파괴되기 전에 계약의 궤를 이곳 느보 산의 어느 동굴에 숨겼다고 한다.

 

2마카 2,4 같은 문헌에 이러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신탁을 받고 나서 사람들에게 천막과 계약 궤를 들고 자기를 따라오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올라가 하느님의 상속 재산을 본 그 산으로 갔습니다. 거기에 가서 예레미야는 동굴 집을 발견하고 천막과 계약 궤와 분향 제단을 그곳에 안치하고 나서 입구를 막아 버렸습니다. 그를 따라간 몇 사람이 길을 표시해 두려고 다가갔지만 그곳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예레미야가 그것을 알고 그들을 꾸짖고 나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 장소는 하느님께서 백성을 다시 한데 모으시어 자비를 보이실 때까지 알려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어야 한다.

 

 

느보 산에서 가장 상징적인 작품이 있다면 그것은 이태리 조각가 지오반니 판토니(Giovanni Fantoni)의 ‘청동 뱀 십자가’일 것이다. 이 작품은 이스라엘 백성이 반역하여 불 뱀에 물려 죽은 사건과 인류 구원을 상징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상징화한 작품으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향하여 서 있다. 마치 모세는 죽어 하느님의 손에 이곳에 묻혔지만 가나안 땅으로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원을 염원하면서 눈감지 못하고 그 자신이 구원의 구리 뱀이 되어 서 있는 것 같다. 40년간 동고동락했던 그는 누구보다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곧‘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들어가 배불리 먹고 살찌게 되면 다른 신들을 섬기고 불륜을 저지를 것’이기 때문이다(신명 31,16.20 참조).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하느님과 모세에게 불평을 하자 하느님은 불 뱀들을 보내어 물려 죽게 하였는데 모세의 간청으로 구리뱀을 쳐다보는 사람은 살아나게 하였다(민수 21,4-9 참조).

 

민수 21,4-9 그들은 에돔 땅을 돌아서 가려고, 호르 산을 떠나 갈대 바다로 가는 길에 들어섰다. 길을 가는 동안에 백성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래서 백성은 하느님과 모세에게 불평하였다. “당신들은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올라오게 하여, 이 광야에서 죽게 하시오? 양식도 없고 물도 없소. 이 보잘것없는 양식은 이제 진저리가 나오.”그러자 주님께서 백성에게 불 뱀들을 보내셨다. 그것들이 백성을 물어, 많은 이스라엘 백성이 죽었다. 백성이 모세에게 와서 간청하였다. “우리가 주님과 당신께 불평하여 죄를 지었습니다. 이 뱀을 우리에게서 치워 주시도록 주님께 기도해 주십시오.” 그래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러자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불 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아라. 물린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게 될 것이다.”그리하여 모세는 구리 뱀을 만들어 그것을 기둥 위에 달아 놓았다.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 그 사람이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다.

 

 

 

 

 

 

눈 쌓인 느보 산

 

 

 

느보는 12지파에게 땅을 분배 하면서 르우벤 지파에게 할당되었다(민수기 32,3.38 1역대5,8). 그러나 이사야서와 예레미야서는 느보에 내릴 재앙을 이야기 하면서 모압땅으로 이야기 하고 있다(이사 15,2; 예레 48,1.22). 성경에서 르우벤 지파에게 할당된 도시로 언급되는 느보는 세 번째 봉우리인 무카야트 봉우리로 추정된다.

 

산 계곡들 사이로는 연중 내내 흘러내리는 여러 개의 개울이 있는데 ‘모세의 샘’ 아윤 무사(Ayoun Mousa)가 그 중 하나이다. 느보 산 기념 성지에 다다르기 전 오른쪽 계곡으로 푸르른 나무들이 자라는 곳에 모세의 샘이 있다.

 

 

 

 

 

 

2. 역사의 흔적 : 전승과 고고학 발굴

 

느보 산 성지를 이야기 하면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인물이 한명 있다. 크로아티아 출신의 성지관구 소속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예로니모 미하익(Br.Jerome Mihaic, 1873-1960) 형제이다. 오늘날 느보 산 모세 기념 성지는 전적으로 이 형제의 열정과 도전적인 모험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예리코 착한 목자 수도원의 정원지기로 있던 이 형제는 요르단 강 동·서쪽에 살고 있는 베두인들의 친구이자 은인이었다.

느보 산에 살고 있던 베두인들은 예로니모 형제를 통해 성지관구에 느보 산 유적지를 팔고 싶어 했다. 그러나 이 소식을 전해들은 성지 관구장은 이미 가지고 있는 신약의 많은 성지들이 있는데 거기다가 구약의 성지까지 돌볼 여력이 없다고 쉽게 무시하였다고 한다.

이에 예로니모 형제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고 성지관구장이 출장을 가서 공석인 사이에 부관구장을 설득하여 땅을 사버리고 말았다. 당시에는 외국인이 요르단의 부지를 매입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마다바에 사는 그리스도 공동체의 도움으로 1932년 10월 4일 프란치스코 성인의 축일 날 시야가와 무카야트 산 정상의 부지를 베두인 부족 13명으로부터 소유권을 넘겨받았다. 그리고 같은 날 요르단 정부는 이례적으로 신속하게 유적지를 발굴할 수 있는 허락을 해 주었다.

 

예루살렘 성지 관구 십자가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상징. 다섯개의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다섯개의 십자가 성처를 의미하며 아래 두 팔중 오른쪽은 수도복을 입은 프란치스코 성인의 팔이며 왼쪽 맨 팔은 예수님의 팔이다.

 

느보 산 성지 입구

 

복원 중인 비잔틴 시대의 성전. 성전의 제단은 해가 떠오르는 동쪽을 향하여 나 있다.

 

느보 산 성지 주변 풍경

 

 

 

 

산 중앙에 보이는 것은 성전 건축용 크레인

 

 

 

2천년 대희년을 맞이하여 느보 산 입구에 세운 기념 조형물. 요한 바오로 2세께서 순례 하시며 축성 했다.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의 성인들을 상징화한 작품이다.

 

 

 

rolling stone. 예수님의 무덤을 막았던 굴리는 돌인데. 인근 마을 faisaliyah에 있던 수도원의 요새화된 문에 사용되었던 것이다.

 

 

눈 쌓인 롤링스톤

 

 

아랍 그리스도인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풍경. 아랍 신자들은 성지를 순례 하고 그들의 염원을 이렇게 나무에  매달고 간다.

 

 

2008년 재건축을 하기 전의 느보 산 기념 성전의 정면.  1963년에 건축한 기념 성전은 모진 바람과 뜨거운 햇살을 견디지 못하여 2008년에 재건축이 시작 되었다.

 

느보 산 기념 성전에서 사해로 내려가는 길. 왼쪽 봉우리가 발라암의 신탁이 있었던 장소라고 한다.

 

 

1933년 예로니모 형제는 3개의 트럭에 짐을 실고 와 창문도 없는 건물에서 모진 바람과 햇살을 견디어 내며 예루살렘 성서대학의 고고학자들과 함께 발굴을 하기 시작하였다.

 

느보산의 작은 형제회 수도원 안

 

수도원 건물...

 

 

수도원 경당 안

 

 

 

 

 

 

로마인들 도로에 있는 이정표(milestone) 돌 기둥

 

 

첫 번째 발굴작업은 예루살렘에 있는 프란치스칸 성서대학의 실베스텔 신부(Fr. Sylvester Saller OFM)의 지도하에 이루어졌다. 시야가의 발굴은 1933년 7월 13일에 시작되어 1935년 그리고 1937년에 걸친 고고학 발굴작업으로 대성당(Basilica)과 비잔틴 시대의 수도원 등 많은 건축물들이 발굴되면서 각종 새들과 동물들로 새겨진 아름다운 모자이크들이 드러났다.

 

직사각형 모양의 건물은 3개의 후진(Apses)을 가지고 있는 전형적인 대성당의 형태를 따른 구조로 사제단석의 모자이크 바닥은 마인(Ma'in)의 채석장에서 옮겨온 커다란 석회석 덩어리로 만들었다.

 

기념 성전 항공 사진.

 

4세기 비잔틴 시대의 기념 성전의 터

 

 

 

1933년 발굴한 4세기의 모세 기념 성전 터

 

 

 

 

 

 

 

 

세례대가 있는 경당과 모자이크

 

하느님의 어머니 경당의 모자이크

 

4세기 대성전의 고고학 발굴 도면

 

 

 

 

 

모세의 죽음을 기념하는 첫 번째 기념 성당은 4세기에 시야가 정상에 지어졌다. 이것은 고고학 발굴작업과 4세기와 5세기에 이곳을 방문한 순례자의 기록에 의해서도 확인 되었다. 근세기에 언급되는 것은 1864년 프랑스 탐험가의 회고록에서 시야가의 폐허에 대하여 언급되고 있다.

느보 산 위의 모세 기념 성당은 394년의 에제리아 수녀의 순례기에서 처음으로 언급되며, 두 번째는 5세기에 가자의 단성론자 주교였던 이베리안의 베드로(Peter the Iberian)의 기록이 남아 있다.

두 개의 긴 희랍어 비문에서는 건물을 재건축한 햇수인 531년과 마다바의 주교 이름, 수도원장의 이름, 로마 관리의 이름과 모자이크 공사를 진행한 장인의 이름을 전해주고 있다.

이 성당은 5세기 후반에 크게 확장되었고 597년에 재건축 되었다. 성당의 모자이크는 각종 새와 동물들로 아름답게 장식 하였는데 그 바닥 아래에는 자연 바위를 깎아서 만든 여섯 개의 무덤이 발견되었다.

 

예로니모 형제는 1960년 6월 20일, 87살의 나이로 하느님께 돌아갔고 느보 산 수도원에 묻혔다.

 

1967년에는 아랍과 유대인간의 전쟁이 일어나면서 느보 산은 군사 지역이 되기도 하였다. 그 후 1976년부터 느보 산은 순례자들과 방문객들에게 개방하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작은형제회 성지 관구에서는 순례자들이 기도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고 유적과 모세 기념성당의 아름다운 모자이크를 보호하기 위하여 1963년에 임시 지붕을 씌웠는데 여러 해가 지나가면서 성지 보호에 문제들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임시방편으로 만든 건물 구조로서는 강한 바람과 햇살 그리고 혹독한 추위를 견디어 내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성지 관구는 2008년에 역사적인 유적들을 보호하고 성지를 찾는 순례자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기 위하여 1963년에 지어진 건물을 뜯어내고 기념성전을 재 건립하기로 결정하였다. 성전 재건축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모세의 전망대와 비잔틴 시대의 아름다운 모자이크와 유물들은 기념관과 임시 천막 안에서 볼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아래 돌 기둥은 로마인들의 도로에 있는 이정표의 돌 기둥이다.

 

로마인들의 도로 이정표 기둥

 

이정표에 새겨진 비문

 

느보 산 기념 성전 경당(임시)

 

 

2011년에는 새 성전이 건립되어 비잔틴 시대에 지어진 아름다운 성전의 모습들을 돌아볼 수 있기를 희망해 본다.

 

 

 

 

 

 

 

2000년 3월 20일 교황 바오로 2세께서 이곳을 순례 하였고 2009년 5월 9일에는 교황 베네딕도 16세가 순례 하였다.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의 느보 산 성지는 그리스도인과 무슬림과 유대인이 예언자 모세 안에서 서로 일치 할 수 있는 곳으로 요르단에 있는 가장 중요한 그리스도교 성지중의 하나이며 요르단 국왕이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있는 장소가 되었다.

 

느보 산의 일몰. 왼쪽으로 사해 북단이 보이며 태양은 예루살렘 위로 지고 있다.

 

 

이스라엘에는 모세와 같은 예언자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주님께서 얼굴을 마주 보고 사귀시던 사람이다.

(신명 34,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