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르단

마케루스 요새(Machaerus)-세례자 요한의 참수터

테오필로 2010. 12. 30. 18:32

 

마케루스 요새

 

 

 

 

1. 지형

희랍어로‘검’을 뜻하는 마카이라(Makhaira, μάχαιρα)에서 유래되는 마케루스(Machaerus)는 사해 동쪽 산언덕 꼭대기에 만들어진 천연 요새로 세례자 요한이 투옥되고 참수된 순교 성지이다.

 

CARAVAGGIO, Salome with the Head of St John the Baptist, 1607, Oil on canvas, 90.5x167cm, National Gallery, London

 

LUINI Bernardino, Salome with the Head of John the Baptist, Oil on wood, 56x43cm, Kunsthistorisches Museum, Vienna

 

SOLARIO Andrea, Salome with the Head of St John the Baptist,1506-07, Oil on panel, 57x47cm, 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사해 북단에서 남쪽으로 약 21km 그리고 사해에서 동쪽으로 7km정도 떨어져 있는 천연적인 지형을 갖춘 해발 700m정도의 산봉우리인데 언덕 꼭대기는 사해 해수면에서 1100미터 높이에 있으며 언덕 주위로는 사방이 깊은 계곡으로 둘러싸여 있는 천연 요새이다.

 

오늘날 요르단 왕국에 위치하고 있는 마케루스는 비잔틴 시대의 성지를 그린 모자이크 지도로 유명한 마다바에서 왕의 도로인 35번 국도를 따라 남쪽으로 약 13키로 정도 내려가면 작은 마을 립(Lib)이 나오는데 여기서 오른쪽(서쪽)으로 방향을 바꿔 약 21키로 정도 더 가면 유적지가 나온다.

 

1.마다바  2.느보산  3.예수님 세례터  4. 마사다 요새

 

Mukāwir 라고 표시된 곳이 세례자 요한의 참수터인 마케루스 요새이다

 

1.세례자 요한의 참수터-마케루스 요새  2. 왕의 도로인 35번 국도와 인접한 마을(Lib)  3.사해

 

1.마케루스 요새의 주차장  2.마케루스 요새 정상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는 그의 「유대 전쟁사」에서 마케루스 요새에 대하여 자세한 지형뿐만 아니라 그 기원에서부터 버려지기까지의 자세한 역사적인 자료를 전해주고 있다.

 

마케루스에서 서쪽으로는 사해의 절경이 바라보이며 가장 높이 솟아 있는 사해까지의 거리가 60 스타디온(1스타디온=185m, 약 11km) 그리고 동쪽으로 뻗은 계곡의 깊이는 100 큐빗(약 43미터)에 이르고 계곡의 능선은 동쪽 맞은편 산으로 이어져 있다고 요세푸스는 전한다.

 

2. 역사

요세푸스는 유다의 하스모니아 왕 알렉산더 얀네우스(Alexander Jannaeus, BC103-BC76년 재위)가 나바테아(Nabatea) 왕국을 견제하기 위해 기원전 90년경에 처음으로 마케루스 요새를 만들었다고 전한다.

수도 페트라로 유명한 나바테아 왕국은 사해 동남부 모압 지역에서 세력을 떨치면서 아레타스 3세(Aretas 3, BC85-BC62)때는 영토 확장을 위해 하스모니아 왕 알렉산더 얀네우스와 격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성벽이 지어진 후 폼페이의 장군 가비니우스(Pompey's general Gabinius)는 하스모니아의 아리스토불루스(Aristobulus 2, BC67-BC63)왕이 마케루스로 도망쳐와 저항하자 기원전 57년에 마케루스를 파괴해 버렸다.

 

2.1 헤로데 대왕  

건축의 귀재라고 불리는 헤로데 대왕(Herod the Great, BC37~BC4 재위)은 요르단 동쪽 지역을 견제하고 유사시 피신할 수 있는 요새이자 별궁으로 사용하기 위해 기원전 30년에 마케루스 요새를 다시 재건하였다.

 

마케루스 요새의 도면 : 1.마케루스 동편 언덕에서 요새로 이어지는 수로  2.동쪽 망루  3.지하 저수조가 있는 기둥열  4.연회장-헤로디아의 딸이 춤을 추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장소  5.헤로데 대왕이 지은 목욕시설  6.북쪽 망루와 아랫도시의 흔적들

 

1.안뜰 기둥열  2.연회장  3.안뜰  4.목욕시설  5.망루

1890년대에 폼페이에 있는 열주랑을 복원한 것을 보여주는 사진으로 마케루스 요새에 있는 열주랑은 폼페이 정원과 같은 시대의 것으로서 아마도 이와 같은 설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비 유다인 출신(이두매아)으로 유대 왕위에 오른 헤로데는 하스모니아 왕가의 공주 마리암과 결혼을 하고 예루살렘 대성전을 복원하는 등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하지만 늘 신변의 위험을 걱정한 나머지 예루살렘 도성 안에 그리고 베들레헴의 헤로디온과 사해 서부의 마사다 그리고 사해 동부의 마케루스 요새를 건설하여 유사시에 피할 수 있는 요새이자 별궁으로 만들었다.

 

마케루스 요새는 사해뿐만 아니라 유대 땅이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이 좋은 곳이기도 하며 특별히 인근에는 천연 온천이 있어서 별궁으로 사용하기에 적격이었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마케루스 지역에는 유황 광산과 명반 광산이 있고 다양한 온천수들이 있다고 전한다. 쓴맛이 나는 온천수도 있고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단 온천수가 품어 나왔다. 또한 한쪽에서는 아주 뜨거운 물이 그리고 다른 한쪽에서는 아주 차가운 물이 흘러나와 양쪽에서 흘러나온 물이 서로 섞여 목욕하기에 아주 좋았고 치료의 효능과 근육을 강화하는데 효과가 뛰어나 많은 병자들이 찾았다고 한다.

 

하스모니아 왕조 시대에는 나바테아 왕조와 패권을 다투었지만 나바테아 여인의 아들인 헤로데 대왕은 아들 헤로데 안티파스와 나바테아 공주를 정략적으로 결혼시켜 평화의 관계를 유지 하였다.

그렇지만 마케루스 요새는 아라비아와 인접한 곳이고 아라비아 영토를 관찰할 수 있는 전략적인 장소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산 정상에 길이 100m 그리고 60m인 성벽을 쌓고 그 세 모서리에는 약 26m(60큐빗) 높이의 망대를 세웠다. 요새 안에는 넓고 화려한 방들이 딸린 화려하고 웅장한 궁전을 건설 하였고 도시에서 요새로 이어지는 길을 연결하였다.

 

 

 

 

 

 

 

 

 

 

 

 

 

 

 

 

 

 

 

 

 

 

 

 

 

 

 

 

 

 

 

 

 

 

 

 

헤로데는 수많은 물 저장소를 만들어 우기에 비를 모아 항상 충분한 물을 비축 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수많은 화살과 투석 장비들을 비축하여 장기간의 포위 상황에 대처할 수 있도록 준비 하였다.

 

마케루스 요새는 1968년, 1973년 그리고 1978-1981년까지 고고학 발굴작업이 이루어졌다.

1978-1981년에는 작은형제회의 예루살렘 성서대학에서 요새를 발굴하여 궁전 터와 요새의 흔적들을 확인 하였다. 요새화된 성곽 안에는 헤로디온 요새의 왕궁처럼 넓은 안뜰이 있고 정교한 목욕시설과 모자이크 바닥이 아직도 남아 있다.

발굴된 도자기류를 통해서 이곳 마케루스 요새는 하스모니아 왕조 때부터 로마시대에 이르는 흔적들을 확인 하였다.

동편 비탈진 언덕에서도 성벽과 망루가 발견 되었는데 요세푸스의 유대 전쟁사에서 언급하고 있는 ‘아랫마을’과 동일시된다. 동쪽 산비탈로 이어진 능선에는 요새 안에 있는 물 저장소로 끌어들인 수로가 발견되었다. 산 중턱에는 여러 개의 동굴들이 파져 있는데 동쪽 산 계곡으로부터 수로가 연결된 것으로 보아 충분한 물을 확보하기 위해 파 놓은 물 저장소로 보여진다. 여기에 있는 동굴들 중의 하나는 어쩌면 세례자 요한이 갇혀 있었던 감옥이었을지도 모르는데 수세기가 지난 후 은수자들의 수행 장소가 되기도 하였다.

 

마케루스 요새에서 동쪽 주차장을 바라보고...하얀 벽이 있는 곳이 주차장 옆 휴게소가 있는 곳이다.

 

주차장에서 바라본 마케루스 요새.

 

마케루스 요새와 북쪽 계곡

 

마케루스 요새의 북동쪽에서 바라본 모습

 

마케루스 요새의 동쪽 능선쪽에서 요새 중턱으로 끌어들인 수로의 모습

 

마케루스 봉우리 중턱 오른쪽의 모습...길 왼쪽으로는 수로가 놓여 있고 길을 따라가면 물을 저장하던 저장소와 동굴들이 있다.

 

 

정결례 예식을 하던 장소.

 

 

 

 

봉우리 중턱에 있는 동굴들. 요새에 필요한 물을 보관하기 위해 만들었지만 수 세기가 지나고 은수자들이 수행을 하던 장소이기도 하다.

 

 

 

아마도 이곳에 있는 동굴들 중 하나에 세례자 요한이 갇혀 있었을지도 모른다.

 

 

 

마케루스 요새 주위로 많은 동굴들이 있다.

 

 

 

헤로데 대왕은 기원전 4년 경 예수님이 태어나자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 아이들을 모조리 죽이라고 명령(마태 1,16참조) 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예리코에서 죽는다.

 

 

2.2 헤로데 안티파스 

헤로데 대왕이 죽은 후 로마는 유다 영토를 분할하여 장남 아켈라우스(Archelaus,BC4-AD6 재위)는 유다와 이두매아 그리고 사마리아를 다스리는 영주가 되게 하고 헤로데 안티파스(Herod Antipas, BC4-AD39년 재위)는 갈릴래아와 요르단 동편 베레아를 그리고 필립보(BC4-AD34 재위)는 베타네아, 트라코니티스, 가우라니티스, 파네아스, 아우라니티스 지역이 주어졌다. 그러므로 이제 마케루스 요새는 헤로데 안티파스의 손에 넘겨졌다.

 

마케루스 요새로 가는 도중 마을에서 만난 양들...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는...꼬리를 내리고 있는것은 양이다.

 

마케루스 요새 입구 표지판. 오른쪽에 보이는 철문이 주차장 입구이다.

 

마케루스 요새 입구와 오른쪽에 보이는 것이 요새의 정상이다.

 

 

 

마케루스 요새 쉼터...

 

 

헤로데 안티파스가 통치할 무렵 세례자 요한이 회개 운동을 시작하며 안티파스에 의해 세례자 요한은 감금되고 참수 되었다고 복음서는 전하고 있다. 특별히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는 그의 「유대 고대사」에서 세례자 요한이 참수 된 장소가 마케루스 요새라고 언급하고 있다.

 

열여섯 살에 통치에 들어선 안티파스는 로마의 바루스(Varus)가 파괴한 세포리스를 재건하고 튼튼한 성벽을 둘러 수도로 삼았다. 그 후 갈릴래아 호수 서쪽에 새 도시의 터를 마련하기 위해 수많은 묘들을 없애고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헌정하는 티베리아를 건설하고 이곳으로 수도를 옮겼다. 묘지 터가 있었던 곳이므로 레위 정결법에 의하면 불결한 곳이었기에 독실한 유대인들은 티베리아로 입주하기를 꺼리자 온갖 무리의 백성들을 강제적으로 끌어들일 수밖에 없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대한 정보는 공관복음서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의 「유대 고대사」에서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이 둘은 전혀 다른 관점에서 이야기 하고 있다.

 

마르코와 마태오 복음에서는 세례자 요한이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한 것을 비난하자(마태 14,4; 마르 6,17-18) 이에 앙심을 품은 헤로디아가 세례자 요한을 죽일 기회를 노리다가 헤로데의 생일날 춤을 춰 헤로데에게 기쁨을 선사한 딸의 도움을 받아 세례자 요한을 참수 하였다고 전한다. 그러므로 마르코 복음에서는 세례자 요한이 헤로데와 헤로디아의 율법에 어긋난 혼인 관계를 꾸짖자 헤로디아의 원한 때문에 세례자 요한은 죽게 된다.(마르 6,17-29; 마태 14,3-12 참조)

 

마르 6,17-29 이 헤로데는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붙잡아 감옥에 묶어 둔 일이 있었다. 그의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 때문이었는데, 헤로데가 이 여자와 혼인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요한은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차례 말하였다.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앙심을 품고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헤로데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말을 들을 때에 몹시 당황해하면서도 기꺼이 듣곤 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좋은 기회가 왔다. 헤로데가 자기 생일에 고관들과 무관들과 갈릴래아의 유지들을 청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그 자리에 헤로디아의 딸이 들어가 춤을 추어, 헤로데와 그의 손님들을 즐겁게 하였다. 그래서 임금은 그 소녀에게,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나에게 청하여라. 너에게 주겠다.” 하고 말할 뿐만 아니라, “네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내 왕국의 절반이라도 너에게 주겠다.” 하고 굳게 맹세까지 하였다. 소녀가 나가서 자기 어머니에게 “무엇을 청할까요?” 하자, 그 여자는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요구하여라.” 하고 일렀다. 소녀는 곧 서둘러 임금에게 가서,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고 청하였다. 임금은 몹시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라 그의 청을 물리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임금은 곧 경비병을 보내며,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고 명령하였다. 경비병이 물러가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어,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주자,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주었다. 그 뒤에 요한의 제자들이 소문을 듣고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무덤에 모셨다.

 

그러나 요세푸스의 유대 고대사에서는 이와 매우 대조적으로 세례자 요한이 죽은 것은 헤로데 안티파스의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죽임을 당하게 된다.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이 대중적인 인기를 이용해서 정치적인 선동을 할까봐 염려해 세례자 요한을 체포하여 마케루스 성으로 데려가 서기 27년경 처형 했다고 전한다.

헤로데는 이복동생인 헤로데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하기 위하여 나바테아 왕국 아레타스 4세(BC9-AD40)의 딸을 소박했다. 이에 나바테아 왕국의 전성기를 이루던 아레타스 4세는 헤로데 안티파스를 전쟁으로 끌어들여 참패를 안겨 주었는데 백성들은 이것을 헤로데 안티파스가 세례자 요한을 처형시킨데 대한 하느님의 징벌로 여겼다고 한다.

 

세례자 요한을 죽인 헤로데는 예수님에게도 위험한 존재였다. 루카 복음에서는 바리사이로부터 헤로데를 조심하라는 경고를 받는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헤로데를 ‘여우’라고 지칭한다.

 

루카 13,31-32 바로 그때에 바리사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어서 이곳을 떠나십시오. 헤로데가 선생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가서 그 여우에게 이렇게 전하여라. ‘보라, 오늘과 내일은 내가 마귀들을 쫓아내며 병을 고쳐 주고,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내 일을 마친다.

 

예수님께서 사형 선고를 받으시기 전에 헤로데는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 로마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사람인 것을 확인하고 갈릴래아의 영주인 헤로데 안티파스에게 예수님을 돌려보낸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우’ 헤로데 앞에서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루카 23,6-9 이 말을 들은 빌라도는 이 사람이 갈릴래아 사람이냐고 묻더니, 예수님께서 헤로데의 관할에 속한 것을 알고 그분을 헤로데에게 보냈다. 그 무렵 헤로데도 예루살렘에 있었다. 헤로데는 예수님을 보고 매우 기뻐하였다.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오래전부터 그분을 보고 싶어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서 일으키시는 어떤 표징이라도 보기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헤로데가 이것저것 물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헤로디아는 안티파스를 부추겨 로마 칼리굴라 황제를 찾아가 왕위를 받도록 했다. 로마의 속국이었던 지역에서는 로마 황제에게 권한을 받지 않으면 임금이 될 수 없었다. 속국의 임금은 다른 나라와 독립적으로 계약을 맺을 수도 전쟁을 선포할 수도 없었고 금이나 은으로 된 화폐를 만들 수도 없었다.

헤로데 안티파스는 영주직에 만족하지 않고 왕직을 탐내게 되지만 황제는 안티파스의 여러 과오를 문제 삼아 영주직마저 박탈하고 갈리아로 유배를 보내는데 헤로데는 헤로디아와 함께 그곳에서 생을 마감한다.

 

3. 유대 항쟁과 파괴

마케루스 요새는 헤로데 안티파스의 후계자인 헤로데 아그립빠 1세(Herod Agrippa I, AD41-44년 재위)에게 넘어갔고 그가 죽은 44년 이후에는 로마의 통치하에 놓이면서 버려진 장소가 된다.

 

유대 제1차 항쟁이 일어난 기원 후 66년 이후에 유대 광복군은 마케루스 요새를 점령하여 항쟁을 하게 된다. 그러나 유다 독립군은 로마군에게 예루살렘을 빼앗김으로써 제1차 독립전쟁은 기원 후 70년에 끝이 나지만 일부 독립군들은 헤로디온 요새, 마케루스 요새, 사해 서부 마사다 요새에서 저항을 계속했다.

 

유대지역 지휘관 루킬리우스 바수스(Lucilius Bassus)가 이끄는 로마군은 헤로디온 요새를 함락시킨 후 제10군단과 함께 마케루스를 치기 위해 진군했다. 요새는 사방으로 깊은 계곡에 둘러싸여 있고 또한 높은 언덕 위에 있으면서 성벽이 둘려 있기 때문에 자연조건상 접근하기 매우 어려웠다.

 

마케루스 요새 동편 언덕에서 만난 양들과 베두인

 

주차장에서(동편)에서 바라본 마케루스 요새. 왼편으로 나 있는 길이 요새 정상에 오르는 길. 산 정상으로 나 있는 길은 지름길이며 오른쪽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가면 동굴들이 나온다.

 

요새 동쪽에서 바라본 마케루스 요새. 오른쪽으로 보이는 것이 사해이다.

 

마케루스 요새의 동북쪽으로 나 있는 계곡

 

 

 

사해 바다가 보인다.

 

 

마케루스 요새의 남쪽 계곡과 사해 바다

 

 

로마군은 요새를 공격하기 위하여 요새를 포위하고 비교적 낮은 동쪽에 있는 언덕으로 제방을 쌓아 올리기 시작하였는데 로마군이 총공격을 개시하기도 전에 요새는 예상치 못하게 쉽게 함락되고 말았다.

 

마케루스 요새에서 바라본 동쪽편 언덕. 버스 주차장이 있는 곳이다. 

 

마케루스 요새의 남쪽 계곡과 사해

 

왼쪽 계곡은 마케루스 요새의 남쪽

 

마케루스 요새의 동쪽 능선과 사해

 

마케루스 요새의 북쪽 계곡(오른쪽)

 

북쪽 계곡

 

마케루스 요새에서 바라본 북쪽 능선..

 

마케루스 요새의 북쪽 언덕 모습과 계곡

 

 

유대 독립군 중에는 출전할 때마다 로마군을 곤혹스럽게 하는 용맹함과 대담성을 보여준 엘르아살이라는 청년이 있었다. 전투가 종결된 어느 날 양측 모두 자기 진영으로 돌아간 후 엘르아살은 혼자 요새 아래 성문 앞에 남아 성벽 위에 있던 동료들과 잡담을 나누고 있을 때 로마 병사들이 급습하여 그를 체포해 버렸다.

로마군은 마케루스 요새에서 잘 보이는 곳에서 엘르아살을 발가벗겨 채찍질 하면서 심리전을 전개 하였는데 엘르아살을 곧 처형할 것처럼 하면서 요새에 남아 투항하는 것은 무모한 짓이므로 투항하면 생명은 보장해 줄 것이라고 설득 하도록 했다. 결국 요새에 남아 있던 이들은 투항하게 되고 로마군은 약속대로 엘르아살과 함께 안전하게 떠나도록 했다. 오늘날에도 현지인들은 이곳을 아랍어로 ‘교수형 장소’를 의미하는 ‘엘-마쉬나카’(el-Mashnaka)라고 부르는데 바로 이 사건에서 유래된 이름인 것 같다.

로마군은 마케루스 요새를 접수 한 후 기원 후 72년에 파괴해 버렸고 그 이후로는 버려진 장소가 되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요한 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