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리고

착한 사마리아인 여관

테오필로 2012. 11. 20. 14:53

 

착한 사마리아인의 여관

 

WYNANTS Jan,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1670, 오일, 127 x 137 cm, 상트페테르부르크

 

기원전 8천 년경에 만들어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의 하나로 알려진 예리코는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 백성이 요르단 강을 건넌 후 처음으로 공격하여 무너트린 성경 역사에서도 유명한 도시이다(여호 6).

모세가 40년간의 광야 생활을 마치고 느보산에서 예리코의 가나안 복지를 내려다보면서 숨을 거두어야 했던 예리코는 예나 지금이나 땅에서 솟아나는 풍부한 물이 있어서 생명의 보금자리인 오아시스로 유명한 도시이기도 하다. 또한 구약의 최고의 예언자인 엘리야는 인근 요르단 강가에서 불마차를 타고 하늘로 승천하였다.

2차 성전 시대인 헤로데 대왕이 통치하던 시기에는 그의 겨울 궁전을 예리코에 건설했기 때문에 예루살렘과 예리코를 잇는 길은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던 길이 되었을 것이다. 기원전 4년에 헤로데 대왕이 죽은 곳이기도 한 예리코는 예수님의 공생활에 있어서도 중요한 곳이었다.

세례자 요한이 회개를 선포한 예리코 인근의 유다 광야는 요르단 강과 이어져 있고,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하면서 인근 요르단 강가에서 세례를 받으셨으며 40일간 단식하면서 유혹을 받으신 곳이며, 세관장 자캐오가 회개의 모범을 보여 주었고 눈먼 소경을 낫게 해 준 예수님의 손길이 닿은 중요한 장소이다.

 

예루살렘은 정치·종교의 중심지라서 사람들이 모여드는 장소라면 예리코는 요르단 계곡, 사해와 암몬 지역의 임금의 큰길’(민수 20,17)을 통해 다마스커스로 연결되는 교통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이 둘 사이를 연결하는 길에는 36km의 유다 광야가 놓여있다.

 

 

 

 

 

 

 

해발 258미터인 예리코에서 760미터의 예루살렘으로 오르기 위해서는 약 1000미터 높이의 유다 광야를 올라야만 한다. 그러므로 고대부터 예루살렘과 예리코를 잇는 광야의 길 위에는 여행객들을 위한 여관인 칸(Khan, 대상숙소)가 있었다. 이 길과 여관을 잘 알고 있었던 루카복음 사가는 예수님의 비유의 장소로 아둠밈 오르막을 인용하고 있다.

 

 

 

 

1. 2차성전시대의 동굴 주거지 2. 2차성전시대의 건축물 3. 2차성전시대의 저수조 4. 비잔틴 시대의 착한 사마리아인 여관 5. 비잔틴 시대의 저수조 6. 십자군 시대의 저수조 7. 착한 사마리아인 성당 8. 착한 사마리아인 박물관 9. 동굴 주거지  

 

 

 

어떤 율법 교사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묻는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루카 10,25).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루카 10,26)고 묻자 율법교사는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루카 10,27)고 대답한다. 그러면서 그 율법 교사는 자기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루카 10,29).

 

이에 대한 예수님의 응답이 그 유명한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이다.

루카 10,30 예수님께서 응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렸다. 31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32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33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34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35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6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37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복음에서 언급하고 있는 착한 사마리아인 여관을 기념하는 유적지는 오늘날 예루살렘과 예리코를 연결하는 1번 국도에 위치해 있다. 오늘날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서안을 가로막는 분리 장벽이 있어 가로막혀 있지만 예루살렘 다마스커스 성문에서 출발해서 겟세마니 동산 앞으로 이어지는 예리코 길을 따라 베타니아를 지나서 예리코와는 거의 중간 지점쯤인 18km 떨어진 장소이다.

 

 

 

 

 

 

 

 

 

 

착한 사마리아인 여관은 이스라엘 관광기반구축공사’(Israel Government Tourist Corporation), ‘요르단강 서안 담당 이스라엘 내무부’(The Civil Administration of Judea and Samaria), ‘이스라엘 문화재 관리국’(Israel Antiquities Authority)의 협력으로 고고학 발굴과 복원을 위해 수년 동안 폐쇄되었다가 20095월에 다시 일반에게 개방되기 시작 하였다.

 

 

 

 

 

유적지는 기념 성지가 있었던 도로의 남쪽 지역과 요새가 있었던 북쪽 지역에 대한 고고학 발굴 조사와 착한 사마리아인 모자이크 박물관 그리고 순례자들을 위한 성지 복원 측면에서 극찬할 만한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이 장소의 성경 지명은 아둠밈 오르막”(Ma’ale Adummim)으로 여호수아가 유다 지파에게 땅을 분배하는 장면에서 언급된다.(공동번역에서는 아둠밈 언덕으로 번역되었다.)

 

여호 15,7 (유다 지파의 영토) 또 그 경계는 아코르 골짜기에서 드비르로 올라간 다음에 북쪽으로 돌아, 그 마른내 남쪽에 있는 아둠밈 오르막맞은쪽의 길갈로 향한다. 그러고 나서 엔 세메스 물쪽을 지나 그 끝이 엔 로겔에 이른다.

 

씨족별로 제비를 뽑아 분배한 영토는 유다와 벤야민 지파를 나누는 경계가 되었다.

여호 18,17 (벤야민 지파의 영토) 거기에서 다시 북쪽으로 구부러져 엔 세메스로 나간다. 그러고서는 아둠밈 오르막앞에 있는 글릴롯으로 나가, 르우벤의 아들 보한의 바위까지 내려간다.

 

착한 사마리아인 여관의 지명을 아둠밈 언덕이라고 부르는 것은 예루살렘과 예리코를 연결하는 이곳 도로가에 있는 바위(암반)의 불그스름한 색깔에서 유래한다. 1번 국도를 달리다 보면 암반 사이에 채워진 불그스름한 석회석을 쉽게 볼 수 있다.

마알레(Ma’ale)오르막길, 언덕을 의미하며 아둠밈(Adummim)불그스름한, 빨간을 의미하는 형용사 아돔(adom), 피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명사 담(dam, 복수는 damim)에서 유래한다. 그래서 이곳을 비잔틴 시대에는 붉은 요새’, ‘붉은 물의 저수조라고도 불렀으며 아랍어로는 피의 언덕’(Tala’at ed-Damm)이라고 불렀는데 이러한 이름들은 모두 여행자들에게 빈번하게 발생하는 노상강도들의 공격 때문에 흘려진 피에서 생겨난 이름들이다.

마치 인류의 첫 조상인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 낳은 첫 아들 카인이 동생을 죽여 땅바닥에 피를 흘렸었던 장소(창세 4,10-11)를 연상케 하는 곳이다. 죽음의 장소인 이곳에서 당시 유다인들 로부터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던 사마리아인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의 신비가 드러난다.

 

오늘날 사마리아인들은 751명의(2012.1.1.일 기준) 아주 작은 유대인 분파이다. 나블루스에 있는 그리짐 산과 텔아비브 근처 호론에 모여살고 있다.

 

그리짐 산의 사마리아인

 

 

통일 왕국은 솔로몬이 죽자 남과 북으로 분리되었고 북 이스라엘은 수도를 사마리아로 정하면서(1열왕 16,24) 사마리아인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아시리아 제국에 먼저 함락당한 북 이스라엘은 이방 민족들에 동화되자 남 유다로부터 신랄한 비판을 받게 된다. 남 유다가 바빌론의 유배에서 돌아오고 나서 제2차 성전을 건설할 때 사마리아인들의 협조를 거부하자 이들은 그리짐 산에 별도의 성전을 건축하면서 유다와 완전히 결별하게 된다. 신약성경에서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 상종하지 않는다.”(요한 4,9)고 언급할 정도로 이들의 관계가 어떠한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로마 황제의 공식 문서에 따르면 아둠밈 오르막에는 알리아 카피톨리나(Aelia Capitolina, 하드리아누스 로마 황제가 예루살렘을 완전히 파괴한 후 붙인 새로운 지명)와 예리코를 이어주는 도로를 책임지고 관리하는 수비대가 배치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곳은 3세기 말경의 카이사리아의 주교 에우세비우스가 성경에 나오는 지명을 지리적. 역사적으로 설명한 지명사전(Onomasticon)에서 언급 하는데 여기에서는 복음서의 비유 이야기는 없이 유다 지파의 땅인 여호수아 15,7절의 장소와 군대 주둔지로만 이야기 하고 있다.

 

이곳을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의 장소라고 언급하는 것은 에우세비우스 주교가 쓴 그리스어 지명사전을 예로니모 성인이 라틴어로 번역하면서 새로운 성경 해석을 덧붙이면서이다. 예로니모 성인은 아둠밈 오르막길을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의 장소와 연결시킨 첫 번째 교부이다.

아둠밈 오르막은 한때 유다 부족의 작은 마을이었지만 이제는 폐허로 남아있다. 이 장소는 노상강도들에 의해 여행자들의 피가 흘려졌기 때문에 그리스어로 붉은 돌들의 오르막길’(Maledomnei)이라는 뜻의 이름이 붙여졌다. 이곳에는 유다와 베냐민 지파의 경계로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는 여행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군사 요새가 만들어져 있다. 주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초주검이 되어 버려진 피투성이가 된 이에게 진정으로 이웃이 되어 준 착한 사마리아인을 기념하면서 이 장소로 상기시킨다(지명사전 25,9-16).

 

요새 유적지(도로 북쪽)

 

동굴 주거지

 

망루(탑)

 

성녀 파울라의 순례 여정을 따라 쓴 예로니모 성인의 편지에서 나는 예리코를 향하여 언덕을 내려가면서 복음에서 부상당한 사람의 이야기를 회상했다. 나는 아둠밈 오르막길이라고 부르는 장소를 보았는데 이곳은 빈번한 공격으로 여행자들의 피가 흘려진 장소이기에 를 의미하는 곳이다. 사제와 레위인은 무참하게 쓰러진 사람을 지나쳐 갔지만 사마리아인은 자비롭게도 초주검이 된 사람을 그의 짐승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다가 치료해 주었다. 이와 같이 예로니모 성인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가르치면서 바위의 붉은색은 이 길 위에서 살해된 여행자의 피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비잔틴 시대부터 십자군 시대에 이르기까지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향하는 이 도로의 주변에는 유명한 여러 수도원들이 있었고 순례의 중심지가 된 요르단강의 예수님 세례터와 연결되었기 때문에 더욱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고고학 조사는 이스라엘 학자인 Yitzhak Magen에 의해서 이루어졌는데 발굴 결과 길을 따라 위치한 첫 번째 집의 흔적이 드러났다.

유적지의 동남쪽에는 돌을 파서 만든 10m x 6m, 높이 1.70m의 제2차 성전 시대의 동굴집이 발굴되었다. 기후변화가 심한 사막지역에서 연한 석회암을 파낸 동굴집은 비교적 일정한 온도를 유지해 주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이용하는 주거형태였다.

 

 

 

 

 

 

 

 

헤로데 때에 바위를 파서 만들어진 저수조와 벽, 화로의 유적이 비잔틴 시대의 작은 성당 엡스 근처에서 발굴 되었다. 다른 저수조는 유적지의 서쪽에서 발견되었다.

2차 성전 시대의 유적지에서는 동굴들, 초가지붕으로 된 진흙 벽돌집과 임시 구조물들과 천막들로 이루어져 있는 부락이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이 시대에 발굴된 대량의 유물들에는 도기류, 등잔들, 유리그릇, 금속연장(도구), 많은 동전들은 이 지역에서의 활발한 삶의 모습들을 보여준다.

헤로데 대왕과 그의 손자인 아그립빠 1세 때 만들어진 동전들 그리고 제1차 로마 항쟁 시대에 만들어진 동전들이 발견되었는데 그 중 하나는 시온을 함락한 두 번째 해”(69)라고 쓰여졌고 다른 하나는 유다의 총사령관이라고 명각된 티투스시대(72)의 동전들이다.

 

예로니모 성인에 의하면 로마군 수비대가 이곳에 요새를 만들었다고 전하는데 그 유적은 지금도 남아있다.

비잔틴 시대인 6세기에는 예리코와 요르단 강을 방문하는 많은 순례자들을 위하여 순례자 숙소와 성당이 세워졌다.

 

성당과 주거지로 이루어진 건물은 26m x 24m의 거의 정사각형 모양으로 남쪽으로 들어가는 중앙 정원과 그 중앙에는 큰 저수조가 있었고, 바실리카 성당은 21m x 11m의 크기였다. 저수조는 서쪽 경사로를 따라 흐르는 빗물을 모으도록 만들어졌다. 성당 안은 두 줄로 된 기둥들이 중앙 신자석과 양측의 측랑을 구분하였고 성당 바닥은 단순한 기하학적인 모양으로 장식 하였다.

 

이곳은 유적지 근처에서 발견된 720년에 만들어진 이정표로 말미암아 초기 이슬람 시대인 8세기까지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십자군 시대에는 예리코로 가는 길에 위치한 이 장소는 수천 명의 순례자들에 의하여 다시금 전례 없는 규모로 지어진다. 기념 성지는 십자군 시대인 1169-1172년 사이에 성전 기사단에 의해서 처음의 것보다 더 큰 60m x 70m 규모로 확장되었다.

 

 

 

 

 

 

 

 

저수조

 

 

 

 

 

 

 

1172년에 테오도로스는 베타니아 넘어 예루살렘으로부터 동쪽으로 4마일에 성당과 함께 붉은 저수조가 산꼭대기에 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요셉은 그의 형제들에 의해 버려진 곳이라고 한다. 또 오래된 전승에 의하면 치드키야 임금은 바빌로니아 군대에 의해 이곳에서 사로잡혔다고 한다(2열왕 25,5). 성전 기사단들은 그곳을 튼튼하게 요새화 하였다.’고 회상하고 있다. 수세기가 지난 후 착한 사마리아인 여관은 수도원 또는 요아킴의 집이라고 불렀다.

성전 기사단은 비잔틴 저수조를 커다란 저수조로 새롭게 확장하고 그 위는 돔으로 덮었다. 그것은 16m x 7m, 깊이 7m이다. 자료에 의하면 이 저수조를 십자군 시대에 붉은 저수조라고 불렀다.

 

 

성전 기사단은 북동쪽 끝에 요새도 만들었다. 70m x 60m 크기의 요새는 요새를 보호하기 위하여 암반을 잘라 만든 6m-7m의 폭과 대략 4m의 깊이의 해자로 둘러싸여 있었다. 망루()9.3m x 8.5m의 크기로 성곽의 북쪽에서 예루살렘과 예리코를 잇는 도로를 내려다 볼 수 있게 만들었다. 오늘날 폐허가 된 요새의 유적지는 도로의 북쪽에서 볼 수 있는데 군사 요새는 성소가 있는 남쪽 장소와 분리되어 있다.

 

십자군 시대의 칸(Khan, 대상 숙박소)과 저수조는 맘룩크시대(14-15세기)까지 순례자들과 여행자들을 위하여 사용되었음을 고대 문헌에서 증명하고 있다. 그렇지만 증언들에 따르면 이 성지는 보잘 것 없이 보존되었고 방치된 곳으로 기록되고 있다.

 

19세기 중반에 자료에 의하면 그것은 보잘 것 없는 형태로 남아 있었다. 오래전부터 카라반들의 숙소(Khan)로 이용되던 착한 사마리아인 여관이 있었던 장소는 1903년에 오스만 터키 제국의 경찰서로 사용되다가 1917년 제1차 세계대전 때 폭격 받아 폐허가 되었다.

영국군이 위임통치 하던 시기(1934-36)에 부분적으로 복구되면서 기념 성당이 발견 되었지만 불행히도 관리 소홀로 대부분의 모자이크의 떠세라(조각들)들은 순례자들의 기념물로 사라져 버렸고, 모자이크 흔적은 거의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고고학 발굴과 개발은 요르단 강 서안 담당 이스라엘 내무부와 이스라엘 문화재 관리국의 관할 하에 이루어졌다. 공사를 위한 자금 조성은 요르단 강 서안 담당 이스라엘 내무부와 이스라엘 관광 기반기축공사의 합작으로 이루어졌다.

 

다행히 수년에 걸친 발굴과 복원 결과 착한 사마리아인을 기념하는 기념 성지는 1.7백만 모자이크 조각들로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 되었다.

 

모자이크 떼세라(조각)

 

 

 

 

 

 

 

 

 

 

 

 

 

 

 

 

 

 

특별히 사마리아, 예루살렘, 가자 지역의 유대 회당과 수도원 등에서 발굴된 모자이크, 세라믹 항아리, 그리고 대리석과 비문들을 모아 전시하고 있다. 명각이 새겨진 모자이크의 단편들은 그리짐산, 나불루스, 크르벳 사마라, -키르베 와 크파르 파마 등지 회당에서 가져온 것이다. 비문과 전례용품들은 유대 광야에 있는 비잔틴 시대의 수도원들에서 온 것들이다. 그리고 사마리아인들의 삶의 모습을 볼 수 있는 모자이크 박물관은 시간을 내어 둘러볼 만하다.

 

 

 

 

I 번 홀 : . 유대인 시나고그(회당)

 

예리코 시나고그(텔 엘 술탄)의 모자이크

 

 

가자 시나고그 : 다윗의 모습

 

 

나아란 시나고그(예리코 북서쪽 위치)의 비문

 

 

II 번 홀 : . 사마리아 시나고그(회당)

 

 

 

 

 

 

그리짐 산 정상. 비잔틴 시대 성당의 유적

 

그리짐 산을 향한 순례 행렬

 

사마리안 파스카 축제(희생 양을 잡는 모습)

 

희생 양의 내장을 번제물로 사르는 모습

 

 

 

 

 

 

 

 

 

III 번 홀 : 키르벳 사마라 회당(세켐 서쪽 위치)

 

 

 

 

 

 

 

 

IV 번 홀 : 성당- 실로의 북쪽

 

 

 

 

 

 

 

V 번 홀 : 성당- 실로의 남서쪽

 

 

 

 

 

 

 

VI 번 홀 : 마르티리우스 수도원(오늘날 마알레 아둠밈 정착촌)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루카 10,33.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