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해 주변

쿰란(Qumran) - 사해 두루마리

테오필로 2008. 12. 14. 22:34

 

쿰란(Qumran)

 

 

  

예리코(Jericho)의 남쪽 12km, 사해의 서북 연안에서 1.3km, 사해 수면에서 약 300m 높이에 위치한 쿰란은 1947년에 쿰란 제1 동굴이 발견되면서 그 부근 일대에 대한 탐사가 시작되어, 1951년부터 1956년까지 5차에 걸쳐 ‘예루살렘 성서 및 고고학 연구소’와 ‘요르단 문화재 관리국’에 의해 대대적인 고고학적 발굴이 이루어졌다.

 

사해의 북서 연안에 있는 키르베트 쿰란(Khirbet Qumran, 히-חירבת קומראן) 부근의 200개 이상의 동굴 중 11개 동굴에서 ‘쿰란 문서’라고 불리는 '사해 두루마리'(Dead Sea Scrolls)들이 발견되었다.

 

쿰란에서는 기원전 8세기부터 서기 2세기까지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발견되었다. 이곳에 사람들이 다시 살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150년경부터인데 기원전 100∼31에 대규모의 모임 장소와 식당, 약 1,000개의 식기류가 저장되어 있는 방, 토기 작업장, 사본의 제작과 필사를 위한 필사실, 물 저장소, 수로, 등 다양한 구조물들이 건축 되었다. 이 시기는 유대교 역사가인 요세푸스(F.Josephus, 37/38∼100?)의 저서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기원전 31년의 큰 화재와 지진으로 파괴되었고, 기원전 4년경 헤로데 대왕(기원전 37-4)의 아들 헤로데 아르켈라오(기원전 22-서기 18?)의 통치 기간에 다시 쿰란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하여 서기 68년 로마군에 의해 다시 파괴되고 이후 로마군의 주둔지가 되었다.

 

쿰란에서는 200여명이 넘는 사람들이 함께 사용할 수 있는 여러 개의 우물이 발굴 되었다. 그리고 쿰란 거주지에서 동쪽으로 약 50m 떨어진 곳에서 1,100기 정도의 무덤이 발견되었는데 이 공동묘지에서 발굴된 유해는 대부분 남자의 것이고 머리가 남쪽을 향해 매장되어 있었다.

 

쿰란 주변의 동굴에서 발견된 토기와 같은 형태가 쿰란 거주지에서 발견 되었고, 또한 쿰란 거주지에서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루고 살았던 주된 시기는 사본의 제작 및 필사 시기와 거의 일치하는데, 이것은 기원전 2세기 중반부터 서기 68년까지 쿰란에서 공동체를 이루며 살았던 사람들이 바로 쿰란 문서를 남긴 사람들이라는 증거이다.

 

 

1. 쿰란 공동체

쿰란 문서의 발견과 쿰란 유적지의 발굴 이후 쿰란 공동체의 정체에 대한 다양한 가설들이 제기 되었다. 필로(Philo Judaeus, 기원전 15/10∼서기 45/50), 요세푸스, 소 플리니우스(Plinius Minor, 61/62∼113?) 등의 문헌에서 에세네파(Esseni)를 언급하고 있는데 이 고전적 사료들이 보도하는 에세네파에 관한 내용과 쿰란 문서에 묘사되어 있는 공동체의 조직·생활·사상 사이에 많은 공통점이 있기에 쿰란 공동체에 대한 에세네파 가설이 지금까지 통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1.1 기원과 역사

에세네파의 기원은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기원전 2세기 초의 하시딤 운동이다. 하시딤은 마카베오가 독립전쟁(기원전 166∼160) 시기에 마따디아와 유다 마카베오의 지휘 하에 모인 다양한 여러 그룹들 중 하나이다. 그들은 율법의 이름으로 헬레니즘과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기원전 175∼164)에 반대하였던 사람들이다. “그때에 정의와 공정을 추구하는 많은 이들이 광야로 내려가서 거기에 자리를 잡았다”(1마카 2,29). 하시딤은 마카베오 가문의 저항은 지지하였지만 그들의 정치형태는 비판적이었고, 결국 요나단 마카베오(기원전 160∼143)의 통치시기에 바리사이파와 에세네파로 분열되었다.

기원전 152년 셀레우코스 왕조의 알렉산더 발라스(기원전 150∼145)는 요나단 마카베오를 예루살렘 성전의 대사제로 임명하였다.(1마카 10,15이하) 요나단은 정통 대사제 집안인 사독 집안 출신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정통 대사제를 쫓아내고 대사제직을 찬탈하였다. 이에 쫓겨난 정통 대사제가 바로 쿰란 공동체의 창시자인 ‘정의의 스승’이다. 정의의 스승은 그를 따르는 사람들과 함께 유대 광야로 가서 공동체를 형성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에세네파의 쿰란 공동체의 시작이다. 이와 같이 쿰란 공동체는 정의의 스승이라는 카리스마적인 지도자와 그를 따르던 사람들에 의해 시작 되었다.

 

1.2 조직과 생활

쿰란 공동체는 쿰란 문서에서 자신들을 ‘공동체’, ‘다수’, ‘회중’, ‘빛의 자녀들’, ‘정의의 자녀들’, ‘충실한 자녀들’, ‘경건한 사람들’, ‘의로운 사람들’,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 등으로 표현한다. 공동체는 출애굽 이후 광야에서 생활하였던 이스라엘 백성을 모델로 조직 되었는데 ‘광야’라는 신학적 주제는 쿰란 공동체의 조직과 생활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즉 공동체는 율법 연구를 통해 주님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 광야로 가서 생활하였다.

쿰란 공동체의 규칙서는 재산을 공유하는 독신자들의 공동체를 묘사하는데, 그들은 흰 옷을 입었고 공동식사를 하였다. 공동 식사는 공동체의 생활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공동 식사에 참여하는 것은 마치 성전의 구역 안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쿰란 공동체에서 공동 식사의 중요한 두 구성 요소는 빵과 포도주이다. 따라서 성전에 들어가기 위해 요구되는 것과 동일한 정결의 수준이 공동체에 요구되었다. 그러므로 공동체의 식사에는 높은 수준의 정결을 유지하는 정식 회원만이 참석할 수 있다.

쿰란 공동체는 정기적으로 정결례를 위한 침수 예식을 거행하였다. 공동체는 이 예식을 통해 자신의 정결과 거룩함을 유지하였다. 이것은 문헌적인 증거뿐만 아니라 고고학적인 증거들에서도 입증된다. 즉 쿰란 공동체의 유적지에서는 제의적 정결 예식에 필요한 정교한 수리시설과 정결예식을 위한 물웅덩이 등이 발견되었다.

 

1.3 종교사상

쿰란 공동체는 유대 전통에 충실하고 율법에 철저하고자 하였던 유대인들의 공동체였다. 그들은 스스로를 참된 이스라엘, 남은 자, 새로운 계약의 공동체 그리고 마지막 시대에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로 이해하였다.

쿰란 공동체는 세계와 인간에 대한 예정론을 따랐다. 예정론적 사고는 이원론과도 관련이 있다. 쿰란 문서의 여러 사본들에서 선과 악, 빛과 어둠, 진리와 거짓, 정의와 불의 등의 이원론이 발견된다. 특히 선한 영과 악한 영에 대한 가르침이 대표적이다. 쿰란 공동체는 자신을 빛의 자녀들로 여겼고, 악한 영이 지배하는 마지막 시대를 살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현재의 곤경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종말에 마지막 승리를 거둔다고 여겼다. 쿰란 공동체는 예루살렘 성전에 대해 비판적이었고 성전의 제사도 거부하였다. 쿰란 공동체는 자신들이 예루살렘의 성전을 대신한 것으로 여기고, 기도와 거룩한 생활로 성전의 제사를 대신하였다. 공동체는 하루에 두 번씩 정해진 시간에 공동 기도를 바쳤는데, 그들은 공동체의 전례를 통해 천상 천사들의 전례에 참여한다고 이해하였다.

이와 같이 쿰란 공동체의 중요한 종교 사상인 새로운 계약 공동체, 예정론과 이원론, 성전 비판과 성전으로서의 공동체 이해, 제사를 대신하는 기도와 공동식사, 메시아사상과 종말론 등은 고대 유대교뿐만 아니라 초대 그리스도교 연구를 위해서도 매우 중요하다. 특히 쿰란 문서와 신약성경의 관계는 많은 관심의 대상이 되어 왔다. 신약성경의 인물들 즉 세례자 요한, 예수, 야고보 등이 쿰란 공동체와 어떤 관계가 있었는가에 대한 가설들이 제기되곤 하였지만 가설을 입증할 아무런 증거도 없다.

 

 

2. 쿰란 문서(사해 두루마리)

 

꿈란 제1동굴에서 발견된 사해 두루마리가 보관되었던 항아리(높이 65.7-47.5cm, 직경 25-26.5cm)

 

  

1947∼1956년까지 사해 연안에 있는 유대 광야의 여러 곳에서 발견된 고대 유대 문서들을 넓은 의미의 사해 두루마리(Dead Sea Scrolls)라고 하며 특별히 사해 북서 연안에 위치한 키르베트 쿰란 주변의 11개 동굴에서 발견된 850여 종류의 문서가 좁은 의미의 사해 두루마리 즉 쿰란 문서이다.

 

20세기 최대의 고고학적 발견이라 불리는 쿰란문서는 1947년 봄 베두인 목동인 무하마드 아드-디브에 의해 우연히 발견되었다. 그는 다른 동료들과 함께 쿰란 근처에서 가축 떼를 돌보던 중 잃어버린 염소를 찾다가 동굴을 발견하였는데, 그곳에서 두루마리들이 발견되었다. 이 쿰란 첫째 동굴에서는 이사야서, 공동체 규칙서, 전쟁 규칙서, 찬양시편, 하바쿡 주해, 창세기 외경 등 7개문서가 발된 되었는데 이 문서들은 아마포에 싸여 항아리에 넣어졌기 때문에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하였다. 현재 예루살렘 히브리대학에 소장되어 있고, 이 문서들의 연대는 대체로 기원전 2-1세기의 것으로 보고 있다.

제4 동굴에서는 판독이 가능한 것만도 382개의 사본 군에 속하는 수천 개의 단편이 발견되었다. 예루살렘의 고고학 박물관에는 쿰란동굴의 것만도 대소 400개 이상의 사본 또는 그 일부, 4만 개 이상의 사본단편이 소장되어 있다.

 

쿰란의 11개 동굴은 발견된 순서대로 번호가 붙여졌고 각 문서들이 발견된 동굴의 번호(1∼11)와 동굴의 위치(Q), 문서 이름의 첫 글자가 붙여져 각 문서의 약호가 되었다.

 

2.1 특징

쿰란 문서는 파피루스나 양피지에 쓰여졌다. 대부분의 문서는 히브리어나 아람어로 쓰여졌으며, 소수의 그리스어 문서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문서들은 정방형의 히브리어로 쓰여졌고, 고대 히브리어로 쓰여진 것들도 있다. 쿰란 문서는 제2차 성전 시대에 유행하던 필사 규칙과 기법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대부분의 쿰란 문서는 기원전 3세기 혹은 2세기 초에서 서기 1세기 초반 사이에 필사된 것임이 밝혀졌다. 쿰란 유적지에 대한 고고학적 연대 추정과 쿰란 문서의 연대 추정이 근접하다는 사실은 쿰란 공동체가 이 문서들을 제작하고 필사하였다는 뜻이다.

 

2.2 쿰란 문서의 종류

쿰란 문서는 다음의 세 종류로 나뉜다.

1) 구약성경의 사본들

쿰란에서는 에스델서를 제외한 모든 구약성경의 사본 200여개가 발견되었다. 이 사본들은 레닌그라드 사본[Codex Leningradenis, 1008, 이 사본에 현대적 사료비판을 하여 만들어진 성경은 ‘키텔’(Kittel)의 ‘히브리어 성경’(Biblia Hebraica)이다.]이나 알렙포 사본[Aleppo Codex, 925/930, 쿰란 문서가 발견되기 전까지 성경의 가장 오래되고 완벽한 텍스트로 알렙포의 회당에서 보존되어 오던 것으로 ‘히브리어 대학 성경’(Hebrew University Bible)은 이 사본을 토대로 한 것이다.] 보다 1000년 이상 오래된 것이다. 쿰란의 이 사본들은 구약성경 정경이 확정되기 이전의 본문으로서 마소라 본문 [히브리어로 '전승'이라는 뜻을 가진 마소라(masoreth에서 유래)는 서기 6세기부터 9세기 사이에 당시 구전되어 오거나 수사본으로 되어 있던 성경 텍스트를 문자 기록으로 확정하였다. 전통적으로 성경 사본에는 모음이 없었지만 마소라 사본은 올바른 발음을 낼 수 있도록 갈릴리 지방의 티베리아에서 유행하던 발성법 모음으로 표시를 해 넣었다.], 70인역 본문[현존하는 구약성경의 히브리어에서 그리스어로 번역된 가장 오래된 번역본이며 이 번역은 기원전 3세기 중엽에 시작하여 2세기 말엽에 종료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이 번역자들은 성경의 열두 지파에서 각각 6명씩 차출되어 그리스어에 정통한 72인의 유태인 학자들에 의해 알렉산드리아에서 번역되었다고 한다. 번역자들의 숫자가 70명이었다는 사실에서 유래하여 70인역(Septuaginta=LXX)라고 부른다. 70인역은 오랜 세월동안 그리스어를 쓰는 히브리인들의 공식 경전이었으며, 신약에 인용되는 구약의 350여 인용구가 70인역에서 취해졌다는 사실로 중요성이 확인된다. 또한 초세기 그리스도교는 70인역을 교회의 공식 구약성경으로 간주하였으며 무엇보다도 제2 경전이 포함되었기 때문이었다.], 사마리아 오경 본문 등과 함께 구약성경 본문 형성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또한 제2 경전 중에 토빗기, 집회서, 예레미아의 편지 등도 발견되었다.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은 70인역 대신 히브리어로 기록된 것만 성경으로 인정했다. 왜냐하면 토빗기에서 비롯된 수호천사 교리와 같은 일부 가톨릭 교리들이 히브리말 성경에 없는 70인역 본문에 그 바탕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쿰란에서 발견된 구약성경 각 권의 사본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창세기(19), 탈출기(17), 레위기(13), 민수기(7), 신명기(30), 여호수아기(2), 판관기(3), 사무엘서 상하(4), 열왕기 상하(3), 이사야서(21), 예레미야서(6), 에제키엘서(6), 다니엘서(8), 열두 예언서(8), 욥기(4), 잠언(2), 룻기(4), 아가서(4), 전도서(2), 애가(4), 집회서(1), 토빗기(5), 예레미아의 편지(1)이다.

에스델서의 사본이 발견되지 않은 것은 쿰란 공동체에서 이 책이 받아들여지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단순한 우연인지는 알 수 없다. 특히 시편, 신명기, 이사야서 등의 사본이 많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이 책들이 쿰란 공동체에서 매우 중요하게 여겨졌으며 또한 대중적이었다는 증거이다.

 

2) 외경 사본들

쿰란 문서의 발견 이전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거나 그리스어, 에티오피아어, 라틴어 등 고대 언어의 번역으로만 알려졌던 구약성경 외경(apocrypha)의 히브리어, 아람어 원본들이 쿰란에서 발견되었다. 즉 희년서, 에녹서, 열두 족장의 유언, 레위의 유언, 납달리의 유언, 유다의 유언, 요셉의 유언, 야곱의 유언, 크핫의 유언, 아브람의 환시, 창세기 외경, 예레미아서 외경, 다니엘서 외경, 에제키엘서 외경, 모세 외경, 여호수아의 시편, 나보니두스의 기도, 거인들의 책, 노아의 탄생 등이다.

 

3) 쿰란 공동체와 관련된 문서들

전체 쿰란 문서의 약 3분의 1은 쿰란 공동체의 조직, 생활, 사상을 반영하는 사본들이다. 공동체에 의해 저술된 문헌들은 대부분 히브리어로 쓰여졌고, 사용하는 용어, 문학양식, 문체뿐만 아니라 종교적 사상에서도 구별되며, 공동체의 자기 이해를 잘 표현하고 있다.

 

2.3 중요성

쿰란에서 발견된 구약성경 사본들은 성경의 형성과 본문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매우 귀중한 자료들이다. 그리고 쿰란의 외경 사본뿐만 아니라 공동체와 관련 있는 문서들은 신구약 중간 시대의 유대 문헌으로서 당시 유대교 연구를 위한 일차적인 사료이다. 이 쿰란 문서를 통해 에세네파와 쿰란 공동체의 조직, 생활, 사상에 대해 더 정확한 지식을 얻게 되었다. 또한 쿰란 문서는 세례자 요한과 예수,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신약성경의 연구를 위한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사해 서남쪽으로 향한 90번 국도

 

 

쿰란 유적지로 오르는 길...버스가 있는 즈음에...

 

 쿰란 언덕을 오르면서...사해와의 사이에 넓은 밭이...

 

 

쿰란 국립공원 주차장과 관리 사무소 및 식당, 선물 판매소

 

쿰란 유적지 에니메이션 상영장 입구

 

에니메이션 상영장 내부에 진열된 쿰란 두루마리가 들었던 항아리 모형

 

 

쿰란 공동체의 식당 및 모임 장소

 

쿰란에서 발굴한 토기들...

 

 

 

 

 

쿰란 유적지 발굴 도면..

1.정결례 욕조  2.수로  3.물저장소  4.식당 및 대규모 집회 장소  5.도자기 굽는 곳  6.주방  7.탑  8.필사실

 

 

계곡을 사이로 쿰란 유적지-왼쪽과 제4.5동굴-오른쪽

 

쿰란 유적지 뒤쪽에 있는 유다 광야 산...11개의 동굴이 있는 산

 

산 자락에서부터 수로를 만들어 물을 끌어왔다...

 

수로...

 

산자락에서 쿰란 유적지를 향하여....유적지 오른쪽으로 작게 뽀족거리며 있는건...순례자들 모습...

 

쿰란 유적지...11개의 동굴들이 있는 유적지 뒷산

 

 

쿰란 계곡...왼쪽 언덕 위 나무들이 보이는 곳이 쿰란 유적지이고...

 

쿰란 계곡...

 

유적지 탑이 왼쪽에 보이고...사진 아래 앞쪽에 있는 언덕이 쿰란 제4동굴. 5동굴이 있는 곳...오른쪽으로..

 

 

쿰란 유적지와...멀리 사해가 보이고...

 

쿰란 유적지 서쪽 산에 있는 동굴들...11개의 동굴에서 쿰란 문서들이 발견됨

 

쿰란 서쪽 산에 있는 동굴들...

 

 

쿰란 유적지...가이드 라인을 따라...

 

수로

 

물 저장소에서 정결례 장소로 수로가 연결...

 

 

물저장소와 수로...

 

 

정결례...쿰란 공동체에서는 정결례 예식이 강조 되었고...이것이 신약의 세례 운동과 관련성이 있다고...

정결례 장소를 보면 사진에서와 같이 내려가는 장소와 씻고 올라가는 장소가 나누어져 있다.

 

정결례 장소...

 

 

 

다른곳에 있는 정결례 장소와 뒤쪽 물저장소...

 

 

 

 

필사실...이곳에서는 펜촉들이 발견 되었다고 함..

 

 

필사실...공동체 식당만큼 넓은 공간을 차지 하고 있다.

 

사람들이 있는 곳이 필사실...

 

필사실...

 

식당과 집회 공간...

 

쿰란 공동체에서는 정결례와 함께 빵을 나누는일이 강조 되었고, 공동체 식사는 성전에 들어가는 수준의 높은 정결이 유지되는 정식 회원만이 참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집회와 공동체 식당으로 사용되던 공간...

 

공동체 식당 옆에는 부엌...

 

공동체 식당과 집회장소

 

공동체 재정을 담당하던 장소...많은 주화들이 발견 된 곳...

 

 

공동체 재정을 담당하던 방...

 

 

도자기를 굽던 곳

 

 

 

 

염소와 양 우리

 

 

이곳에서는 수백개의 등잔들이 발견 되었다고 하는데...성서 공부가 강조 되었기 때문에 밤에 성서 연구를...

 

 

 

타워 쪽에서 사해를 바라보고...저 멀리 지평선쯤에 보이는...

 

도자기류 보관 방

 

작업장...

 

 

유적지 가이드라인과 서쪽 산...

 

 

타워부분...

 

돌들이 쌓여 있는 중앙 부분이 타워...

 

 

 

타워에서 사해 남쪽을 바라보고...

 

 

 

 

타워부분...

 

많은 유골들이 발견된 묘지...1100기 정도의 무덤이 발견 되었다고...

 

채광막이 설치된곳에서 쿰란 제4동굴을 바라볼 수 있다...그리고 근처에서 발굴 작업을...

 

쿰란 제4동굴쪽에서 바라본 유적지의 쿰란 제4 동굴 전망대...

 

쿰란 제4동굴 전망대 근처의 고고학 발굴공사 장...

 

 

 

 

 

 

 

 


 쿰란 제4동굴 전망대에 설치된 동굴 안내. 쿰란 유적지에 블러그용 사진을 찍으러 갔다가...우연히 아랍 아이들이 쿰란 제4동굴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따라가 봤습니다. 제4, 제5동굴은 가파른 낭떠리지 언덕에 위치해

있어서 위험하기도 하고...출입이 금지된 곳이었지만...쿰란 동굴 내부를 볼 수 있는 행운이었습니다.

 

쿰란 계곡에서 바라본 쿰란 제4 제5동굴...저 멀리 계곡을 보면 아주 조그맣게 사람들이...

 

아랍 아이들이...

 

동굴이 보이는 곳은 쿰란 제5동굴...반대쪽에 있는것이 제4동굴...그 능선을 따라가 보면 아이 하나가 중간에

올라가 있고...다른 아이들은 계곡 아래에 있는것이 보입니다.

 

동굴 아래 한명이 아래를 내려다 보고 있는것이 보이죠...

 

다른 아이들도 합류를 해서..

 

 

이곳이 쿰란 제5동굴...

 

쿰란 제5동굴과....쿰란 제4동굴을 볼 수 있는 전망대에 순례자들이 모여 있고...그 오른쪽은 고고학 발굴장.

 

쿰란 계곡과 쿰란 제5동굴

 

쿰란 동굴 전망대와...아래쪽에 있는 언덕이...쿰란 제4동굴, 제5동굴이 있는 곳..왼쪽에 막대와 줄로 출입 제한선을...

 

쿰란 제4, 제5동굴로 내려가는 능선길...

 

다시 두갈래길로...왼쪽이 제4동굴...오른쪽이 제5동굴...

 

위쪽에서 내려갈 수 있도록 굴이...

 

 

쿰란 제4동굴 내부...길이 8.5m x 너비 3m x 높이 3m 크기..바닥에 검은것은 염소똥...

 

 

벽에 무슨 글씨가...

 

굴 밖으로...건너편 채광 시설이 보입니다...유적지에서 꿈란 동굴을 보게 만든 곳...

 

 

 

 

 

모두 4곳이 뚫려 있습니다.

 

 

 

동굴 안에서 쿰란 유적지쪽을 바라보고...

 

 

제 5동굴쪽으로 나 있는 통로...계단을 내려서듯 아래쪽으로 내겨가는 구조...

 

아래에선 아랍 아이들이...

 

제4동굴에서 제5동굴을 바라보고...앞에 있는 동굴이...제5동굴...낭떠러지길입니다...간신히 벽을 잡고...

 

 

 

 

제5동굴에서 쿰란 계곡을 보고...

 

제5동굴에서 제4동굴을 바라보고...

 

제5동굴 안

 

제5 동굴도 위쪽에 나 있는 구멍과...왼쪽을 통해 보면 쿰란 계곡이...

 

 

 오른쪽 능선이 쿰란 동굴로 가는 길...

 

쿰란 동굴에서 나와 유적지를 바라보고

 

왼쪽은 쿰란 유적지...오른쪽은 쿰란 제4, 제5동굴이 있는 곳

 

 

보이는 동굴이 쿰란 제4동굴...위쪽에서 내려갈 수 있는 구멍이 있습니다.

 

쿰란 제4동굴과 쿰란 계곡

 

 

 

1번이 쿰란 제4동굴...2번이 쿰란 제5동굴...

 

 


 이스라엘 국립 박물관 안에는 '사해사본 보관소'가 따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쿰란 공동체 에세네파의 사상과 같이 '빛과 어둠', '선과 악'을 표현하기 위해 왼쪽 검은 대리석 벽과 오른쪽 하얀색으로 대조를 주었고, 오른쪽 하얀 타일은 쿰란 문서를 보관하고 있던 항아리 뚜껑을 본뜬 것입니다.

 

사해 사본을 보관하고 있던 항아리 뚜껑 모양의 하얀 대리석 주위 네 모퉁이는 이스라엘 제단의 네 귀퉁이돌을 형상화 한것입니다.

 

검정색 대리석 벽면은 쿰란 공동체가 믿는 이원론적인 사상에서 '어둠'과 '악'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검은색 대리석과 마주하는 하얀색 상징물은 '빛'과 '선' 등 장차 도래할 '구원'을 상징합니다. 

 

 

하얀 대리석 아래 내부 모습...아래 손잡이는 토라 손잡이를 형상화 했고, 쿰란에서 발견한 이사야 66장 전권이 전시되어 있는 사해사본 전시관의 가장 핵심 부분입니다. 그외 쿰란에서 발굴한 시편과 하바쿡 주해서등 성경 사본들과 생활 물품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읽자!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존귀한 지식"을 얻도록! (필립 3,8)

 

"성경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다!"

(성 예로니모, 이사야서 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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