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성가정 피난 성당(아부 세르가 성당)

테오필로 2010. 12. 2. 06:11

 

성가정 피난 성당

 

1. 올드 카이로와 성가정 피난 성당

 

기원전 332년 알렉산더 대왕이 이집트를 점령한 후 알렉산드리아를 수도로 삼고 헬레니즘 문화의 중심지로 삼았다. 그 후 639년 아랍 군이 이집트를 점령하고 오늘날 ‘올드 카이로’(Old Cairo) 부근(Fustat)을 수도로 삼으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콥트 카이로’는 ‘올드 카이로’의 일부로 아부 세르가 성당(Abu Serga), 공중교회(Hanging Church), 성 조지 성당, 벤 에즈라 유대인 회당, 바빌론 성채, 콥트 박물관 등 많은 콥트 교회의 성당들과 수도원, 유적들이 있는 곳이기 때문에 ‘콥트 카이로’로 불려진다.

 

1.올드 카이로(콥트 카이로)  2.고고학 발물관  3.기자 피라미드   올드 카이로와 고고학 박물관 왼쪽으로 흐르는 것은 나일강이다. 기자의 피라미드는 나일강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나일강에서 대피라미드까지는 약 8km거리이다. 

 

1.바빌론 성채  2.공중교회  3.콥트 박물관  4.아부 사르가(성가정 피난 성당)  5.성 바르바라 성당  6.벤 에즈라 유대인 회당  7.성 조지 수도원  8.성 조지 수도원(그리스 정교회)  9. 성 조시  10.동정 마리아 & 결혼 식장 홀  11.그리스 멜키트 묘지  12.콥트 교회 묘지  13.그리스 정교회 묘지 M: 1호선 Mari Girgis 역

 

 

 

 

기원전 6세기 초 페르시아인들이 나일 강에 성채와 수로를 지으면서 이들이 정착한 이곳을 바빌론이라고 불렀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기원전 323-30) 이후에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진 장소가 되었다. 오늘날 남아 있는 바빌론 성채는 이때 지어진 것이다.

 

마태오 복음에 따르면 헤로데 임금은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 유다인들의 임금님으로 태어나신 분에게 경배하러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란다. 헤로데는 동방 박사들에게 그 아기를 찾거든 자신도 가서 경배할 테니 알려 달라고 하지만 동방박사들은 꿈에 헤로데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다른 길로 돌아간다(마태 2,1-12 참조).

 

 

이집트로 피난, 지오또, Fresco, 200x185, Cappella Scrovegni(Padua) 

 

동방 박사들이 돌아간 뒤 주님의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라고 명령한다.

 

마태 2,13-15 박사들이 돌아간 뒤, 꿈에 주님의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너에게 일러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없애 버리려고 한다.” 요셉은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내가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파피루스(성경을 필사했던 종이) 위에 성가정이 피난하는 모습을 그린 성화.

 

 

 

아기 예수를 목욕시키기 위해 성모님과 성 요셉이 물을 길어 올리는 모습이 정겹다. 천사가 물 뜨는것을 돕고 있다.

 

 

 

 

 

동방박사들에게 속은 것을 안 헤로데는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이라고 명령한다. 헤로데가 죽자 주님의 천사가 다시 요셉에게 나타나 아기의 목숨을 노리던 자들이 죽었으니 이스라엘 땅으로 되돌아가라고 명령한다.

 

마태 2,19-21 헤로데가 죽자, 꿈에 주님의 천사가 이집트에 있는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거라. 아기의 목숨을 노리던 자들이 죽었다.” 요셉은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갔다.

 

 

아기 예수님은 이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그의 목숨을 노리는 세상의 임금으로부터 피신해야만 했다. 이스라엘 백성이 파라오의 종살이로부터 탈출해 나왔던 바로 그 땅으로 몸을 숨겨야 하는 운명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이집트를 구원하기 위한 하느님의 뜻이었다. 성가정의 피난 여정을 따라 수도원과 성당들이 세워지면서 이집트는 그리스도 문화가 꽃피는 곳이 되었기 때문이다. 성가정이 시련 속에서 꽃피워 열매 맺은 결실이 바로 ‘콥트 교회’이다.

 

이사 19,1 이집트에 대한 신탁. 보라, 주님께서 빠른 구름을 타시고 이집트로 가신다. 이집트의 우상들은 그분 앞에서 벌벌 떨고 이집트 사람들의 마음은 속에서 녹아내린다.

 

이사 19,19 그날에 이집트 땅 한가운데에 주님을 위한 제단 하나가 세워지고, 그 국경에는 주님을 위한 기념 기둥 하나가 세워질 것이다.

 

이사 19,25 곧 만군의 주님께서 “복을 받아라, 내 백성 이집트야, 내 손의 작품 아시리아야, 내 소유 이스라엘아!” 하고 말씀하시면서 복을 내리실 것이다.

 

 

성가정이 헤로데 임금을 피해 이집트로 피난 오면서 바빌론 성채가 있는 이곳 올드 카이로에 잠시 머무른다. 전승에 의하여 성가정이 3주 정도 머물렀던 이곳에 ‘성가정 피난 성당’이 지어졌다.

 

오른쪽에 1호선 기차역이 있고, 왼쪽 계단을 통해서 지하로 내려가면 성가정 피난 성당으로 가는 길

 

 

성가정 피난 성당으로 가는 골목길

 

 

 

오늘날 콥트 교회에 속한 성가정 피난 성당은 ‘아부 세르가’(Abu Serga 또는 Abu Sarga)라고 부르는데 5세기에 지어진 이집트에 있는 콥트 교회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이다. 성당 규모는 17m x 27m, 높이 15m이다. 이슬람이 통치하던 초기에는 타종교에 대한 관용 정책으로 올드 카이로 지역에 많은 성당들이 건축되었다.

 

성가정은 아기 예수를 죽이기 위해 추격해 오는 병사들을 피해 한곳에 머물지 못하고 나일 강을 따라 상·하 이집트에 있는 여러 지역으로 옮겨 다니면서 3-4년 동안 이집트에서 머물렀다.

성가정의 이집트에서의 여정은 알렉산드리아의 23대 총대주교(384-412)인 테오필로가 전하고 있다. 콥트 교회에서는 성가정이 방문한 장소들에 성당과 수도원들을 지어 성가정의 은총과 수난을 기억해 오고 있다.

 

성가정이 피난 한 장소에 수도원들이 지어졌다.

 

 

2. 아부 세르가 성당(성가정 피난 성당)

 

이집트는 전승에 의하면 알렉산드리아에 온 복음사가 성 마르코에 의해 41-43년 경에 그리스도교가 전교되었다. 교회사 열권을 남겨 ‘교회사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팔레스티나 카이사리아의 주교를 지낸 에우세비우스(Eusebius, 260/264경~340경)는 ‘성 마르코는 클라우디우스 황제(Claudius, 41-54년 재위)가 통치하는 첫 해 또는 세 번째 해에 이집트에 왔다’고 진술하고 있다.

당시 로마 황제의 잔인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신앙은 곧 대중들 깊숙이 스며들었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밀라노 칙령에 의해서 그리스도교 박해는 끝이 나고 4세기가 끝나갈 무렵 그리스도교는 이집트의 국교가 되었다.

 

그러나 541년 칼체돈 공의회의 결정에 반발 하면서 알렉산드리아의 이집트 교회는 콥트 교회로 태어나게 된다.

 

콥트 교회의 ‘예수님 피난 성당’은 두 명의 순교 성인, 성 세르지우스와 바쿠스(St. Sergius and Bachus)에게 봉헌하였다. 예수님을 충실하게 믿던 로마의 군인이었던 이들은 로마 신에게 경배하는 것을 거절하였고 이로 인해 심한 고문을 받고 막시미누스(Maximinus) 황제 때인 296년에 시리아에서 순교하였다. 그들의 시신은 시리아에 묻혔고 일부 성유물은 아부 세르가 성당에 보관되어 있다.

 

시나이 성 카타리나 수도원에 있는 성 세르지우스와 성 바쿠스, 13세기 그리스 정교회 이콘

 

성 세르지우스와 성 바쿠스, 콥트 교회 이콘

 

 

아부 세르가 성당은 콥트 교회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장소이기도 하다. 9세기부터 11세기까지 콥트 교회의 많은 총대주교들과 주교들이 이곳에서 선출되고 축성 되면서 1077년까지 카이로의 주교좌성당이 되었다. 이곳에서 처음으로 선출된 이는 총대주교 이삭(Isaac, 681-692)이다.

역사적으로 알렉산드리아가 콥트 교회의 총대주교좌가 있는 곳이었지만 아랍이 침입한 후 제국의 수도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카이로로 옮겨지면서 콥트 교회의 총대주교좌도 1047년부터 공중교회(Hanging Church)로 옮겨지고 공식적인 총대주교좌가 되었다.

1910년에 구 카이로에 설립된 콥트 박물관은 중요한 콥트 교회의 예술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성당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마리아와 요셉 그리고 아기 예수가 머물렀다고 하는 지하 경당이다. 경당은 전승에서 성가정이 머물렀다고 하는 자리에 지어진 원래 성당의 흔적을 담고 있다. 경당은 10미터 정도 깊이에 있는데 종종 물에 잠기기도 해 통제될 때가 있다. 오늘날 성당 지하에 위치한 이 경당은 처음 지어질 때는 성당의 본당이었지만 성당이 크게 증축 되고나면서 지하 경당이 되었다. 크기는 6m x 5m, 높이 2.5m이다. 동·남·북쪽으로 둥근 벽감이 만들어졌다.

  

 

성가정 피난 기념 경당으로 내려가는 계단. 성가정 피난 성당은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어 부득이 엽서를 스캔했습니다.

 

기념 경당 내부 모습

 

 

 

 

 

 

 

성당은 4세기에 건축되기 시작하여 5세기에 완공했다. 그 후 마르완 2세(Marwan II)가 통치하던 750년경에 불탔고, 8세기에 복원되었다. 성당은 11세기와 17세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2000년도에 복원되는 과정을 거쳤지만 중세기의 아름다움은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아부 세르가 성당은 하나의 회중석에 두 개의 통로로 나누어져 있는 바실리카의 구조를 하고 있다. 본당 회중석(nave)은 사도들을 상징하는 12개의 기둥에 의해서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각 기둥은 사도들의 이콘이 그려져 있고 코린토 양식의 기둥머리는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아무런 장식이 없는 기둥이 하나 있다. 이것은 주님을 배반한 유다의 기둥이라고 한다. 11개 기둥은 흰색 대리석이고 하나의 기둥만 붉은 화강암 기둥이다. 기둥 위쪽에는 성인들 이콘이 그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매우 아름다운 제대 ‘이콘 칸막이’(성상대, Iconostasis)에 있는 흑단과 상아로 만든 장식은 가장 오래된 것으로 12-13세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북쪽 이콘 칸막이에는 베들레헴의 예수님의 성탄, 빵과 포도주의 기적을 나무에 새겨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다. 그리고 남쪽 이콘 칸막이에는 드미트리 성인, 성 조지, 성 테오도라 성인의 상이 나무에 새겨져 있다. 예수님의 생애와 동정 성모 그리고 다양한 성인들 이콘들은 아부 세르가 성당의 벽들을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다.

 

 

 

 

 

 

 

 

 

 

  

 

 

성당에서 가장 중요한 지성소의 안쪽 제대 위쪽에 있는 목재 천개(canopy)는 네 개의 기둥으로 받쳐져 있는데 전능자이신 그리스도(Pantocrator)와 동정 마리아에게 나타난 천사 가브리엘이 그려져 있다. 제대 뒤쪽의 후진은 아름다운 모자이크로 장식되었다.

 

 

 

 

아부 세르가 성당은 이집트에서 가장 오래된 제대를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은 콥트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성당 천장은 가장 흥미로운 부분 중의 하나로 '노아의 방주' 모양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성당의 북서쪽에는 세례대가 있으며 가장 소중하고 오래된 이콘들은 남쪽 벽면에 있다.

 

 

 

3. 신학 논쟁

 

초대교회에서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서로 다른 두 개의 사유노선이 동방의 강력한 두 총대주교좌 사이에서 형성되게 된다.

 

초대교회 다섯 총대주교좌 중의 하나인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는 전승에 의하면 복음사가 성 마르코에 의해 전교된 사도 교회이다. 200년경 알렉산드리아는 그리스도교의 가장 큰 센터 중의 하나가 되었고 당시 최고 신학자인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Clemens Alexandrinus)와 오리게네스(Origenes) 교리학파는 플라톤적이고 사변적 성향이 강한 신학이었다.

알렉산드리아 노선은 그리스도의 통일성을 강조한 것으로 4세기의 최고 신학자는 아타나시우스와 5세기 초에는 412년부터 총대주교직을 수행했던 알렉산드리아의 치릴로(Cyrillus Alexandrinus)가 이 학파의 최고 신학자였다. 이들은 육신과 영혼을 갖춘 그리스도의 온전한 인간성을 인정했으나 두 사람 다 분리될 수 없는 통일성을 강조했다. 신성과 인성은 나란히 병립하는 것이 아니라 단일한 실재를 이룬다는 것이다.

치릴로는 “말씀이 인간이 된 것이지, 인간 안에 들어왔거나 인간을 취한 것이 아니다!”고 했다. 그저 한 인간이 ‘취해진’것이 아니고 그저 내적으로 결합된 것도 아닌 인간 예수가 하느님이라는 것이다.

 

반면 안티오키아의 루치아노(Lucianus)가 창설한 안티오키아 교리학파는 세심하고 냉정한 문법적·역사적 성서 해석이 그 특징이었다. 이 학파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사고가 다소 우세했고 합리주의적 분위기였다.

안티오키아의 노선은 하느님과 인간의 상이성을 강조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온전한 인간이 하느님에 의해 취해졌다는 것이다. 로고스가 인간 예수 안에서 마치 일종의 성전처럼 자리 잡고 있거나 예수를 자신의 ‘도구’로 이용한다는 것이다.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 치릴로 대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네스토리우스 학파의 경향에서 비롯된 이 긴장 관계는 양 주교좌의 경쟁으로 격화되었다. 이 두 유형은 칼체돈 공의회(Council of Chalcedon, 451년, 제4차 보편공의회)에서 맞닥뜨려지게 되었다.

 

우선 안티오키아 노선의 대표자인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네스토리우스와 알렉산드리아 노선의 대표자인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치릴로의 논쟁은 치릴로의 승리로 끝났다. 로마 총대주교좌가 개입하게 되고, 네스토리우스는 처음으로 로마주교에게 보고하지만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다. 당시 로마 사람들은 그리스어 전문 신학용어들을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 문서는 심사를 위해 다시 그리스어에 정통한 동방 전문가에게 보내어 졌다. 반면 치릴로는 곧바로 자기 문서를 라틴어 번역문과 함께 보냈고 430년 로마 교회 회의에서는 네스토리우스를 단죄하게 된다. 오늘날 가톨릭 교의사학자들은 네스토리우스가 이단자가 아니라 정통적이었다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이고 있다.

 

치릴로의 후임자인 알렉산드리아의 디오스코루스는 “육이 되신 말씀의 한 본성”이라는 치릴로의 정식을 극단화 하여 신성과 인성의 두 본성은 한 방울의 물이 바다에 흡수되듯 인성이 신성에 의해 흡수 된다는 콘스탄티노플의 수도원장 에우티케스를 지지하게 된다.

 

알렉산드리아와 콘스탄티노폴리스가 대립하게 되자 중재를 원했던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는 이번에는 전적으로 알렉산드리아 편을 들면서 449년에 공의회를 에페소로 소집하고 사회권을 디오스코루스에게 맡겼다.

‘치릴로파’ 지역인 이집트와 팔레스티나와 아시아에서 온 약 150명의 주교가 참석한 후 개막되었지만 반대파들은 황제와 디오스코루스의 계획에 따라 처음부터 저지되었다. 다수파가 디오스코루스를 지지했지만 알렉산드리아는 로마가 함께 할 때 강력하다는 것을 망각하고 로마의 요구들을 간단히 거부해 버렸다. 디오스코루스는 공의회에서 자신의 의견을 관철하기 위해 위협뿐만 아니라 군인들과 간병인들 그리고 왈패들을 불러 폭력까지 행사하였다. 그래서 이 공의회는 로마의 레오 교황으로부터 ‘강도 공의회’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디오스코루스는 황제의 지지를 받아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켰지만 채 1년이 지나지 않아 상황은 반전되었다. 450년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가 말에서 떨어져 죽고 그의 뒤를 이은 마르키아누스 황제는 공의회를 칼체돈에 소집하였다. 고대 교회에서 가장 많은 주교들이 참석한 이 공의회의 사회는 로마 교황이 보낸 사절이 사회권을 부여 받았고, 강도 공의회의 주역인 디오스코루스는 공의회 시작 때 파직되어 발언권마저 빼앗긴 상태에서 피고석에 앉아 있어야 했다.

 

칼체돈 공의회는 교회 정치적으로 볼 때 알렉산드리아에 대한 콘스탄티노플의 승리를 의미했다.

 

칼체돈 공의회 신조 : “…우리는 한 분이고 같은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합니다. 같은 분이 신성에서 완전하시고 그리고 같은 분이 인성에서 완전하시며 참으로 하느님이시며 참으로 인간이십니다. …본성 안에서 혼합되지 않으시고, 변화하지 않으시고, 분리되지 않으시고, 나누어지지 않으시고, 인식할 수 있으며 …두 위격으로 나뉘거나 분리되지 않으십니다. …”

 

칼체돈 공의회의 결정은 알렉산드리아와 안티오키아 그리스도론을 종합한 최고의 진술이라는 평가를 받게 되지만 교회의 분열을 가져왔다. 이미 이집트와 제국 변방에서는 분리주의와도 결합되어 있었기 때문에 알렉산드리아에서는 단성론자가 총대주교가 되고 주교좌를 장악 하면서 콥트교회는 갈라져 나갔다.

디오스코루스의 파면 때문에 자부심에 큰 상처를 입은 이집트와 함께 칼체돈 공의회에서 ‘단성설파’로 단죄 받은 시리아와 팔레스티나 지역에서는 칼체돈 공의회를 ‘네스토리우스파’ 공의회로 단죄 하면서 공의회에 맞서 저항운동을 벌였고 6세기 중엽부터는 제국교회에 맞서 비잔틴 제국의 안과 밖, 특히 이집트, 시리아, 아르메니아, 에티오피아 지역에서 독자적인 교계제도를 갖춘 일정한 ‘교파’를 형성하게 된다. 오늘날에도 이들 교회들 간에는 상호 친교를 맺어 오고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단성파’는 그리스도는 오직 한 본성만을 지녔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용어로서 이들에게 적용하는 것은 문제가 있는 용어이다. 에우티케스가 주장하듯이 인간적인 본성이 신성 안에 흡수 되었다고 가르치던 사람들은 소수였고 갈수록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신학적인 논쟁의 주요 원인으로는 인간적인 원인들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알렉산드리아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두 총대주교좌가 자신들의 권력 투쟁을 신학영역으로 전가한 때문이기도 하다. 경쟁하던 신학들의 대표자인 알렉산드리아와 콘스탄티노플이 서로 대립하면서 알렉산드리아는 동방에서의 수위성과 전체 교회에서의 둘째 지위를 수호하려고 했고 잠정적으로 로마와 제휴하고 있었으며 콘스탄티노플은 비잔틴 제국의 수도로서 강력하게 부상하고 있었던 터였다.

 

고대교회의 그리스도론뿐만 아니라 삼위일체론 및 신경 등과 관련한 논쟁에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아 그리스도교가 체계화 되면서 희랍어 전문용어들을 적확하게 사용할 수 없었다는 데에 문제가 있었다. 신학적이고 철학적인 전문 용어들은 문화권이 다르고 언어권이 다른 지역에서는 같은 용어더라도 서로 다르게 이해할 여지가 다분했기 때문이다.

 

 

4. 콥트 교회

 

‘콥트’라는 말은 희랍어로 ‘이집트’를 의미하는 단어를 아랍어로 표시하면서 아랍어 ‘콥티’(qobti)에서 유래된 단어이다.

이집트 제관들이 사용한 상형문자는 기원전 8세기까지 사용되다가 문자가 없어지거나 결합되어 민중어로 발전되었으며 기원전 3세기까지 사용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치하에서 희랍 문화와 언어가 접목되어 콥트어는 희랍어 알파벳과 희랍어의 많은 외래어를 받아들였다. 콥트어는 민중어 7개의 자모에 희랍어 알파벳 24 자모를 받아들여 31 자모의 알파벳으로 이루어져 있다. 콥트어는 크게 상부 이집트에서 사용된 사히드어(Sahidisch)와 하부 이집트에서 사용된 보하리어(Boharisch) 두 개 방언으로 나뉜다. 기원후 3세기에서 8세기까지는 상부 방언 사히드어가 문학어로 널리 사용되었고 9세기부터 12세기까지는 하부 이집트 방언인 보하리어가 사용되었다. 639년 아랍인이 침입하기 이전에는 콥트어가 종교와 일상생활에서 다 같이 통용되는 언어였다. 그러나 10세기부터는 아랍어가 이집트 민중어인 콥트어를 완전히 밀어 내어 콥트어는 이집트 콥트 교회의 전례언어로 남게 되었다. 이집트 콥트 교회가 보전 해 온 콥트어는 1799년 발견된 로제타석(Rosetta Stone) 비문을 통해 이집트 상형문자를 해석해 내는 열쇠 역할을 하였다.

 

콥트어 문헌은 주로 번역 작품으로 콥트어로 번역된 최초의 문헌인 신구약성경 번역본과 1945년 나그 함마디에서 발견된 4세기에 콥트어로 쓰인 영지주의 작품들과 토마 복음 등 중요 번역편들이 발견되었다. 성 파코미오(Pachomius, 292-346. 성인. 수도원 제도의 창시자)가 남긴 수도 규칙은 콥트어로만 전해진다. 콥트어로 쓰인 최초의 문헌은 최초의 '사막 교부'인 이집트의 성 안토니오의 편지들 단편과 파코미오의 생애와 작품 등 이집트 수도원 제도와 관련된 작품들이다.

 

 

이집트의 국교는 이슬람교이며, 국민의 약 90%가 이슬람교도인데, 대부분이 수니파에 속한다. 이집트 정부 발표에 의하면 그리스도 신자는 10% 정도라고 하지만 이집트 콥트교 신자들은 그것보다 배가 많은 20%정도라고 이야기 한다. 그리스도교 신자중 약 95%가 콥트교 신자들이다.

 

초세기에 이집트 교회는 아리우스 주의, 영지주의, 마니교 등으로 정통 그리스도교를 뿌리내리는데 어려움을 겪지만 3세기에 이집트는 성 안토니오(Antonius, 250~365, 은수자)와 성 파코미오 등과 같은 위대한 사막 교부들에 의해서 수도생활이 꽃핀 곳이기도 하다.

 

콥트 교회에서는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 284-305 재위) 시대에 박해를 받아 많은 순교자가 나왔는데 이것을 기념하기 위해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즉위한 284년을 콥트 원년으로 하는 콥트력을 사용하고 있다. 이 때문에 콥트교회에서는 콥트력을 ‘순교력’이라고도 한다. 그레고리아누스력을 사용하는 우리의 2010년은 콥트력으로 1726년이며, 콥트교회에서는 예수님께서 이집트에 입성한 ‘성가정 피난 축일’을 콥트력 Bashans 24일에 지내고 있다. 우리에게는 6월 1일에 해당한다.

 

이집트의 콥트 신자들은 1400 여 년간 지속된 이슬람의 치하에서 무거운 세금과 온갖 박해 그리고 약자로서의 고통을 받으며 아직도 끈질긴 생명력을 이어오고 있다. 아이가 태어나면 손등에 십자가 문신을 새겨 주어 십자가 지신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가도록 각성시켰기에 온갖 수난 속에서도 1900여 년 간의 그리스도교 신앙을 지켜올 수 있었을 것이다.

 

 

 

5. 벤 에즈라 유대인 회당

 

콥트 카이로 안에는 1115년에 지어진 ‘벤 에즈라 유대인 회당’(Ben Ezra Synagogue)이 있는데 이것은 원래 8세기에 지어진 콥트 성당이었다. 그런데 콥트 교회는 무슬림들이 요구하는 엄청난 세금을 지불하기 위해 이 성당을 예루살렘의 유대인 아브라함 이븐 에즈라(Abraham ibn Ezra)에게 882년 팔았다.

 

벤 에즈라 유대 회당은 갈대 상자 속에 넣어져 버려졌던 모세를 파라오의 공주가 건져 올린 곳이기 때문에 ‘모세 기념 회당’이라고도 한다.

 

 

올드 카이로에 있는 이 회당의 ‘게니자’(genizah, 히 : גניזה)에서 1864년에 870년경부터 19세기까지 쓰인 약 280,000개의 유대교 필사본들과 다량의 고문서들이 발견되는데 이 게니자를 ‘카이로 게니자’라고도 부른다. 1896년 솔로몬 셱터(Solomon Schechter)는 게니자에서 가져온 필사본 조각을 전해 받고는 즉시 그 가치를 알아보고 카이로로 가서 많은 문서들을 얻게 되면서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순례자의 책"(김이경, 뿌리와이파리)에서는 게니자를“죽은 책의 영혼이 잠자는 책의 무덤"이라고 표현을 했지만 유대교 전통에서 보면 '책의 무덤'은 맞지만 '죽은 책'이지는 않다. 하느님이 죽을 수 없듯이 하느님의 말씀을 담고 있는 두루마리도 불멸하는 존재인 것이다. 유대교에서는 "하느님" 이라는 단어가 쓰인 모세오경 두루마리나 탈무드 등이 낡아서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되면 정중한 예식을 갖추어 매장하였다. 특히 오경 두루마리는 낡거나 파손되어 사용할 수 없게 되었을지라도 그 거룩함은 변하지 않고 남아있는 것이기 때문에 살아있는 인격체와 같이 다루었다. 이들은 절차를 갖춰 땅에 묻어야 하지만 편의상 유대교 회당에는 이들을 모으는 ‘게니자’에 함께 모으고 보통 매 7년마다 장사를 지낸다고 한다. 성 프란치스코도 그의 유언에서 “지극히 거룩하신 주님의 이름과 말씀이 기록된 책을 부당한 곳에서 발견하면, 나는 그것을 주워 모으기를 원하고 또한 다른 이들도 그것을 주워 모아 합당한 곳에 모시기를 부탁합니다.”(유언 12항)고 이야기 하고 있다.

 

12세기 최대의 상업도시였던 이집트 카이로에서 발견된 게니자 안에서는 유대교 율법서인 토라뿐만 아니라 혼인계약서, 편지 및 다량의 문서들이 발견되었다. 이미 유럽의 많은 가톨릭 국가에서 추방당한 유대인들과 1480년 톨레도 칙령에 의해 스페인에서 추방당한 유대인들은 이슬람 국가인 이집트의 카이로에 몰려들면서 카이로는 전 세계 유대인 공동체의 중심이 되었다.

 

게니자 안에서는 수많은 편지들이 발견 되었는데 이 자료들 중에서 특별히 900-1200년 사이에 기록된 문서는 당시 유대인들의 삶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들이다.

 

게니자에서 발견된 편지들은 이집트, 팔레스티나, 시리아, 스페인, 모로코와 러시아뿐만 아니라 중앙아시아 등 전 세계에 흩어진 유대인 공동체에서 카이로에 있는 랍비에게 아랍어와 히브리어 그리고 이디시어(yidish, 유대인들이 쓰는 서게르만어군 언어)로 쓴 편지들이다.

 

편지의 내용에는 파스카 기간에 무엇을 먹어야 하는지, 안식일에 아이들에게 무엇을 읽어줘야 하는지 등 종교적인 내용들도 있지만 유대 여자들이 일상적인 삶에 대하여 랍비에게 질문하는 내용들도 있다. 예를 들면:

“아이들이 공부하기를 좋아하지 않는데 어떻게 해야 하지요?”

“남편이 일하기를 싫어하는데 랍비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내 이름은 ‘사라’인데 다른 이름으로 바꾸고 싶어요…….”

“남편이 두 번째 아내를 원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솔로몬 셱터는 카이로 게니자에서 발견된 “다마스커스 문서”(Damascus Document)를 1902년에 출판하면서 에세네파 유대인들이 남긴 문서일 것이라고 추정했는데 1947-1956년에 사해 근처 쿰란에서 ‘사해사본’이 발견되면서 사실로 입증되었다. 또한 희랍어와 히브리어로 쓰인 집회서 본문이 발견되었는데 그중 몇 편은 사해 두루마리에서도 발견 되었다.

 

 

6. 일치를 향하여

 

주님께서는 수난 당하시기 전에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요한 13,34)을 남겨 주셨다. 그러나 사도들이 전해 준 유산은 여러 가지 형태와 방법으로 받아들여졌으며 생활조건과 환경의 다양성에 따라 서로 다르게 발전하였다. 여기에 외부적인 원인과 상호 이해와 사랑의 부족으로 분열의 빌미가 되었다.

그리스도의 혼솔 없는 속옷을 찢어 놓은 첫 번째 분열의 원인은 에페소와 칼체돈 공의회의 교의 정식 논쟁에서 그리고 그 후대에 들어 동방 총대주교좌와 로마 사도좌 사이의 교회적 친교의 단절로 생겨났다.

 

교회는 정통 신앙을 보존하기 위해 많은 고통을 겪어 왔고 또한 겪고 있다. 계시된 신비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신학적 표현들로 대립하기보다는 서로 보완해야 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일치 교령을 통해서 가톨릭교회는 동방 교회들의 진정한 신학 전통과 관련하여 ‘그 전통이 참으로 탁월한 방법으로 성경에 뿌리를 박고, 전례 생활로 육성되고 표현되며, 살아 있는 사도전승과 동방 교부들과 영성가들의 저술에서 양식을 얻고, 올바른 생활 제도와 그리스도교 진리의 완전한 관상을 지향하고 있음’(일치교령 17)을 인정한다. 그리고 ‘동방 교회들의 제도, 전례, 예법, 교회전통, 그리스도교 생활 규범 등을 가톨릭교회는 존중한다. 존경스러운 그 오랜 교회에서는 사도들로부터 교부들을 통하여 내려온 전통이 빛나고 있음’(동방교회 교령 1)을 받아들인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서로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십시오.”

(요한 17,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