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무덤 성당

예수님 무덤 성전의 장소에 대한 진위성? 골고타=성 밖?

테오필로 2007. 3. 4. 17:05

예수님 무덤 성전(부활 성전)이 언제 지어졌고, 지어질 당시 장소에 대한 확증을 어떻게 했느냐는 질문에 대하여 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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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예루살렘 부활성전의 위치에 대하여 소개하기 위해 예루살렘 성곽이 확정되기 시작하는 과정을 소개하는 것이 유익할것 같습니다.

 

현재의 예루살렘에 이스라엘의 도성이 자리잡게 된 것은 기원전 1000년경 다윗(1000-961/1004-965)이 예루살렘을 점령하면서부터 시작됩니다. 다윗은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오벨 산 언덕에 도시를 세워 “다윗의 도성“이라 칭했고(2사무 5,9) 키럇여라림에 있던 계약의 궤를 도시 안으로 옮겨와(2사무 6장) 정치적.종교적으로 이스라엘의 중심지로 만들었습니다.

 

아래 그림은 기원전 10세기경 다윗이 여부스족으로부터 예루살렘을 점령한 후 "다윗의 도성"이라고 명하며 세웠던 예루살렘입니다. 분홍색 선 안쪽이 현재의 구 예루살렘 이며, 그 아래쪽 작은 관모양의 크기가 다윗 시대의 예루살렘입니다.

 

 

 

솔로몬 시대(기원전 960-926년 재위)에는 도시 중심지가 오벨 산보다 좀더 북쪽인 모리야 산 언덕(창세 22,1-19, 현재의 황금돔 사원이 있는 곳)으로 옮겨지고 계약의 궤를 모실 성전과 화려한 궁전, 그리고 튼튼한 성벽을 세웠습니다(1열왕 5-8장).

아래 그림은 기원전 10세기 경 솔로몬 시대의 예루살렘의 규모입니다. 다윗 시대의 다윗 도성에서 성전산(모리야산)쪽으로 확장해 갔고, 성전산 안쪽에 있는 상자 모양이 솔로몬이 지은 성전의 위치입니다.

 

그 후 예루살렘은 주변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서 파괴와 복구의 과정을 겪게 되고, 기원전 63년경에는 로마제국의 지배하에 머물게 됩니다. 이때 로마황제의 총애를 받아 헤로데 안티파스(기원전 4년-기원후 37년)가 왕으로 등극하고 이후 기원후 30/31년경에 예수님이 골고타 언덕에서 십자가형에 처형됩니다. 그리고 난 후 44년경에 이스라엘 전역은 로마의 직속령이 됩니다.


1차 유다 독립항쟁(66-70년)의 결과로 유다는 로마의 속주가 되고 모든 특권이 박탈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2차 유다 항쟁(132-135년) 후 예루살렘에서 모든 유다인들은 추방되게 됩니다.


유다의 항쟁이 일어나는 시기에 로마 제국은 하드리아누스 황제가(117-138년)가 등극하여 제국을 순시하면서 아테네에 올림피아의 제우스 신전을 짓게 하였고, 130년에는 예루살렘을 순시하여 예루살렘을 로마인의 도시로 재건하고 이름을 “엘리아 카피톨리나”로 개명하였습니다. 그리고 성전터에는 제우스 신전을 세울것을 명했습니다. 이것이 제2차 유다 항쟁을 불러 일으키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2차 항쟁을 진압 한 후 루푸스 총독은 예루살렘에 엘리아 카피톨리나를 건설했고, 골고타(갈바리아)에는 로마의 최고 신 제우스와 그의 아내 헤라 여신 및 미의 여신 비너스를 섬기는 신전을 세우고 옛 성전도 제우스 신과 하드리아누스 황제를 섬기는 신전으로 개축하였습니다. 이 후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은 요르단과 시리아 등지로 피신하게 됩니다.


그 후 콘스탄티누스 대제(306-337년 재위)에 의해 예루살렘뿐만 아니라 팔레스티나 전 지역이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게 됩니다(325년).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는 324년에 예루살렘으로 성지 순례를 왔는데, 당시 예루살렘의 주교로부터 쥬피터와 비너스 신전이 자리하고 있는 곳이 골고타와 예수님의 무덤이 자리하고 있는 곳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황제에게 알려 도움을 청합니다. 그 후 326년에 황제의 명에 의해 그 신전이 헐리게 되고 골고타와 예수님의 무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가 발견된 주요 장소를 아울러 그 위에, 그 후 10년 후에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는 대성전이 세워졌습니다(335년). 예수님과 제자들의 발자취가 담긴 유서깊은 곳에 기념 성전들이 세워짐으로 인해 순례의 도시로 변모하게 되었습니다.


현재의 예루살렘 성곽을 본 이들이라면 그리고 골고타 언덕이 “도성에서 가까운 곳”(요한 19,20)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신자들이라면 성곽 안에 있는 예수님의 무덤 성전의 역사성에 대해서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골고타와 예수님 무덤의 원래 모습은 사라졌지만 현재의 기념 성전이 자리하고 있는 곳은 골고타와 무덤이라는 역사적인 신빙성은 확실하다고 합니다.


예루살렘을 로마의 식민지로 만든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유다계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해체시킬 목적으로 골고타 언덕을 깍고, 예수님의 무덤이 위치한 정원은 돌로 메꾸고(135년), 그 위에 로마 신전을 지었습니다. 역설적이지만 로마의 신전이 세워지게 됨으로써 골고타와 예수님 무덤의 위치는 잊혀지지 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황제의 명에 의해 신전이 헐고 나서 발굴 작업을 한 결과 여러개의 무덤들과 골고타의 바위 언덕 그리고 십자가가 버려진 우물들을 확인 함으로써 장소에 대한 더 이상의 이견은 없었다고 하고, 또한 최근 발굴작업의 결과 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성곽 밖의 골고타는?

현재의 구 예루살렘의 모습이 확정된것은 터키 제국의 슐레이만 대제(1520-1566년 재위)가 팔레스티나를 통치하던 1532년부터 보수 및 재건하기 시작하여 1539년에 완성된 것입니다. 슐레이만 대제는 오스만 투르크의 10대 술탄으로 26세에 왕위에 올라 46년간 제국의 역사상 가장 오랜 동안 재위한 임금으로 제국의 황금기를 이루었던 왕입니다. 정치적인 수완뿐만 아니라 문화 예술 분야에서도 전성기를 이루었습니다. 종교적으로는 시아파와 수니파의 수장을 합병함으로써 통합을 이루었고 군사적으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여 제국의 영토를 두배로 확장했었던 왕이었습니다.


티투스 황제에 의해 예루살렘이 파괴되었을 때(70년) 성곽의 크기는 현재 정도였고, 4세기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할때에는 서쪽의 시온산과 남쪽에 위치한 다윗의 도성이 성곽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지만, 7세기에 회교도들이 예루살렘을 점령하면서 다시 성곽의 규모는 작아졌습니다. 이때 시온산과 다윗의 도성이 성곽 밖으로 위치하게 되었고, 1539년에 현재의 모습이 확정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시대에 성 밖에 있던 골고타는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없애기 위해 로마 신전을 지으면서 성안으로 흡수 된것이라고 보면 될것입니다.

 

아래 그림은 헤로대 시대의 예루살렘 입니다. 솔로몬의 성전 왼쪽으로는 "아랫도시와 윗도시"로 나뉘어 있고(도시 명은 산 위의 능선 위에 지어진 도시를 연상하면 이해가 될듯 싶습니다...) 왼쪽 검은 점은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을 한 시온산입니다. 현재는 아래쪽 도시와 시온산의 최후의 만찬은 구 예루살렘 성곽 밖에 위치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솔로몬의 성전 오른쪽 위쪽엔 "안토니오 성"이 있는데 예수님께서 이곳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안토니오 성곽 오른쪽에 파란 색은 "베짜다 연못"의 위치입니다. 그리고 헤로데 시대의 성곽 중앙 위쪽 밖에 표시된 곳이 골고타 자리입니다. 헤로데 시대엔 "성 밖" 이었지만 현재에는 성 안이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