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순례 준비는 어떻게?

성지 순례의 의미

테오필로 2009. 7. 23. 22:02

 

성지 순례의 의미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성지중의 성지인 예수님 무덤 성당에 살면서 종종 회의하게 하는 것이 있다면 너무도 다양한 방문객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이다. 이곳은 전 세계에서 오는 모든 사람들의 발길이 닿는 곳이기 때문에 마치 해변 가에서나 볼 수 있는 여자들의 옷차림부터 반바지차림의 슬리퍼에 러닝 차림의 구경꾼들이 있는가 하면 순례자를 자처하면서 보여주는 무질서함과 이기적인 모습들을 바라보고 있자면 많은 상념들이 지나가곤 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묻히시고 부활하신 바로 그곳, 그리고 주님께서 다시 오시리라는것을 선포하는 그리스도 신앙인들에게 가장 소중한 장소에서 마음을 내려놓고 잠시 기도할 시간도 없이 총총걸음으로 왔다가 후다닥 사라져 가는 우리 순례자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삶의 비애가 느껴지기도 한다.

반면 가끔 타 종파인 이슬람 순례자들이지만 하얀 순례복으로 통일하여 정갈하게 옷 입고 신발을 벗어들고 예수님의 무덤을 들어가기 위해 긴 줄에 서서 하염없이 경건하게 기다리는 모습은 감동을 자아내게 한다.

 

 

동일한 장소이지만 어떤 이들에겐 신발을 벗어(참고: 탈출 3,5) 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방문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자신이 서 있는 곳이 어느 곳인지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우리들에게 성지(聖地)의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엄밀한 의미에서 순례기 다운 최초의 순례기라고 말할 수 있는 ‘에제리아 순례기’를 통해서 순례의 의미를 나누어 보고자 한다.

 

얼마 전 이태리 중부에서 지진이 발생하여 많은 인명과 재산 피해를 주었던 아레조(Arezzo)의 수도원 도서관에서 1884년에 발견된 에제리아(Egeria 또는 Aetheria) 순례기는 기원 후 381-384년경 스페인지방에 살고 있던 한 수녀가 동쪽에 있는 성지를 순례하면서 보고 들을 것을 기록한 것으로 아쉽게도 중간 부분만이 전해져 오고 있다.

내용을 살펴보면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전반부는 여정에 따른 묘사로 이집트에서 성산 시나이를 거쳐 예루살렘을 지나 콘스탄티노플까지 순례하면서 성지와 순교자들의 무덤을 참배하거나 수도자나 은수자들을 방문한 기록이다. 그리고 후반부는 당시 예루살렘의 전례에 대한 기록으로 특별히 부활시기의 전례와 신심행사를 생생하게 그려주고 있어 전례사 연구에 중요한 문헌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이 산도, 예루살렘도 아닌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드릴 날이 올 것(요한 4,21-24 참조)이라고 말씀 하셨고,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신전에 살지 않으며(사도 17,24 참조), 바오로 사도는 우리들 자신이 살아 계신 하느님의 성전(2코린 6,16 참조)이라고 가르쳤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는 신전 중심이었던 로마의 다른 종교들과 달리 마음의 종교, 내면의 종교라고 말할 수 있었고 그렇기에 특정한 장소에 대한 관심이 없었다. 더구나 그리스도교가 태동하는 순간부터 박해의 역사였고, 이제 막 피어나려고 하는 그리스도교의 싹을 잘라 버리기 위해 골고타와 예수님의 무덤 위에는 이미 로마의 신전이 들어서 있었던 상황이었다.

 

세상 어느 곳에서나 진리의 영 안에서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었던 그리스도교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선포한 밀라노 칙령(313년)으로 그리스도교가 공인되고, 그 후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고 돌아가신 골고타와 묻히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무덤 위에 대 성전이 지어짐으로써(336년) 커다란 변화가 생기게 되었다.

 

요르단의 마다바(Madaba)에서 발견된 6세기의 모자이크 지도에서 볼 수 있듯이 비잔틴 시대에는 이미 예루살렘을 세계의 중심으로 그리고 있고, 예루살렘의 중심에는 부활 대성당이 자리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성지가 차지하고 있는 위상을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내면의 종교였던 그리스도교는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을 기념하는 예수님 부활 대성당(십자군 이후에 ‘무덤 성당’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됨)과 특정한 ‘장소’를 중심으로 재편되었음을 의미하고 아울러 세계 곳곳에서 순례자들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순례자들이 죽을 위험과 온갖 불편함을 마다하고 척박한 동방의 땅으로 향하도록 한 것은 무엇일까? 오늘날은 비록 교통의 발달과 풍부한 자원들의 도움을 받아 편안하고 안락한 순례를 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추어져 있지만 성지 이스라엘을 순례하고자 하는 이유는 예나 오늘이나 변함이 없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믿는 신앙의 근원에 가 보고자 하는 열망이다.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 하셨던 갈릴레아 호수가를 걸어 보고 싶고, 요르단 강에 손을 담가보고 또 십자가 지고 가신 그 고통의 길을 걸어 보고 예수님의 무덤에 들어가 거룩한 돌에 입 맞춰 보고 싶은 것이다. 이러한 순례 행위를 통해 순례자들은 신앙의 거룩한 근원과 교감하며 구원의 체험, 거룩함의 체험을 하고 싶은 것이다.

 

이미 4세기에 동방의 성지를 찾아 떠났던 에제리아의 경우가 그랬다. 여성의 몸으로써 이국 만리인 동방을 향해 떠나고자 했던 간절함은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예수님의 무덤을 향해 달려왔던 마리아 막달레나의 마음(요한 20,1-18 참조)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구원의 역사가 선포되고 이루어진 예수님의 땅을 직접 가서 봄으로써 성경의 말씀을 더욱더 가까이 느끼고자 하는 열망은 성지의 성스러움을 더했을 것이다.

 

더구나 4세기 이후 예루살렘뿐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흔적이 묻어 있는 수많은 장소들에 기념 성전들과 수도원들이 지어졌다. 아울러 성지순례를 할 수 있도록 로마제국은 도로와 숙박시설들 제공하였고 또한 로마 병사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되어 성경의 사건들이 일어난 ‘중요한 장소들을 보고 싶은 열망’은 신자들로 하여금 순례의 길을 떠나게 했다.

이제 성스러운 장소는 성스러움을 표현한 성전 건축물들과 특별한 신심 행위들로 그 장소만의 특별한 전례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고 성지는 특별한 장소로서 ‘그 곳’만의 성스러움을 만들어내게 되었다. 이와 같이 성경의 사건들이 일어난 장소는 다른 장소와는 구별되는 특별한 장소로서의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이다.

 

성지 팔레스티나의 성스러움은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을 전하고 있는 전승과 성경에 대한 회상을 통해 이루어지는 성스러움이었다. 그것은 순례자들이 각자의 삶의 자리를 떠나 성경의 장소인 바로 ‘그 곳’에서 현재가 아닌 과거 예수님의 시간으로 소급되어 일어나는 성스러움인 것이다.

순례자들이 바라보는 것은 몇 백 년 후에 지어진 기념 건물이나 풍경 그 자체가 아니라 그곳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를 회상하는 일이며, 그것을 통해 복음과 전혀 무관한 이방인이 아닌 예수의 선포를 직접 듣는 대상으로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성지의 어느 특정한 ‘장소’ 안에서 경험하는 시간은 항상 ‘지금 현재’가 아닌 성경이 의미를 전해주는 바로 동일한 ‘시간’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에 순례자가 느끼고 체험하는 것은 다름 아닌 성경의 존재 의미인 ‘예수님의 선포’를 직접 듣게 되는 것이다.

일반 여행객들은 방문하는 곳의 외적인 모습에 의해 감동을 받는 것이라면 순례자들은 전승과 성경에 의한 ‘교회의 증언’을 통해서 먼 과거에 ‘그 곳’에서 일어난 일을 회상하면서 성스러움에 잠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순례지에서의 성스러움의 경험은 언제나 성경과 전승이 전해주는 ‘회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렇게 성경과 전승의 말씀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성지 이스라엘을 폴 사바티에는 '제5의 복음'이라고 이야기 했다. 

 

그러므로 성경을 알지 못하는 순례자들은 일반 여행객들이 느끼는 감흥과 별반 다르지 않다. 성경을 알고 있는 순례자들, 성경에 대한 앎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나와 특별한 관련이 있다고 고백하는 순례자들은 성경이 증언하고 있는 장소에 대한 경외심을 통해서 새로운 부활을 체험하게 된다. 마치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님의 무덤에 들어가 빈 무덤인 것을 발견하고는 ‘보고 믿었던 것’처럼 막연하게 들어 알고 있던 성경의 말씀들은 예수님의 증언에 대한 회상을 통해 신앙의 빛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순례자들이 그리스도가 서 있던 곳! 가르치던 곳! 기도하던 곳! 그리고 고통 받던 곳에서 서 있다는 것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연결 해 주는 영적인 다리 위에 서 있는 것이며 거룩한 성경상의 과거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성지순례가 단순한 여행과 비교되는 가장 큰 차이점은 ‘성경에 대한 경외심’에서 시작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이에 대한 간절한 염원이다. 예수님이 느끼셨을 베들레헴 구유의 불편함을 직접 느껴보고 싶어 성탄 구유를 만들었던 마음이고, 예수님이 짊어지셨을 무거운 십자가의 고통을 직접 느껴보고 싶어 했던 성 프란치스코의 간절한 마음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이 바로 안락한 삶의 자리를 떠나 구원의 현장으로 떠나게 하는 마력일 것이다.

 

 

에제리아의 순례기에서 반복되어 언급되고 있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목적지인 어떤 성지에 도착하면 관습에 따라 그 장소와 관계되는 성경 구절과 시편을 낭독했습니다. 그리고 봉헌 예절을 마치고 사제들과 수도자들의 안내로 가까운 성지로 갔습니다.”

 

“우리는 목적지인 성지에 도착하면 먼저 기도하고 그 다음에 성경 낭독 그리고 적당한 시편을 읊은 후 다른 기도를 하는 관습을 지켰습니다. 하느님의 은혜로 우리는 언제나 성지에 도착할 때마다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성당에 도착하면 우리는 관습대로 기도하고 해당되는 성경과 시편을 낭독한 후 마지막 기도를 마치고 내려왔습니다.”

 

에제리아가 어느 장소를 방문하든지간에 습관이 되어 지켰던 것은 바로 기도와 그 장소에 맞는 성경 구절의 낭독, 시편낭독, 기도로 이어지는 전례였고 성지를 순례하는 은총의 표시이기도 하였다.

 

성지 순례를 하면서 성경의 내용이 순례자들에 의해 단순히 확인되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선포되고 읽혀진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성경이 단순히 책장에 꽂혀 있는 먼지 수북한 한권의 책으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선포를 통해서 살아 있는 생명의 복음이 된다는 것이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먹어라.” “너희는 모두 받아 마셔라......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예수님께서 수난 전날 제자들과 최후 만찬을 드시며 하셨던 이 말씀은 이제 사제의 손 안에서 미사성제를 통해서 오늘 이 자리에서 기억되고 재현되는 것이다.

 

전승과 성경의 증언으로 인해 거룩했던 성경의 장소는 이제 다시 말씀이 읽혀지고 선포되면서 다시금 거룩한 장소로 변화한다. 이와 같이 말씀이 선포되는 전례는 단지 성스러움을 기념하는데 그치지 않고 성스러움을 직접 만들어 내게 됨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즉, 성스러움을 찾아 떠나온 순례자들이 성경의 바로 그 장소에서 행하는 회상과 기념을 통해서 성스러움은 지속되는 것이다.

 

성지순례를 하면서 성지에서 거행되는 기념과 신심행위들의 중요성과 특수성은 그 전례를 통하여 예수님의 전 생애가 과거의 시공간 안에서 새로운 시공간 안으로 생생하게 살아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성지의 성스러움을 통하여 세상 어느 한 장소에 한정되지 않고 진리의 영 안에서 예배하는 세상의 모든 곳으로 확장되는 것이다.

 

불행히도 예수님의 기적들과 말씀을 들으며 따라 다녔던 수많은 군중들 중 대부분이 구경꾼들이었듯이 오늘도 무덤성당을 방문하는 많은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 중에서 구경꾼들을 가려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성스러운 공간을 잃어버린 현대인은 불행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온갖 군상들 안에서 나의 모습은 어떠한가? 오늘도 바람결이 스쳐 지나간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루카 1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