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

제2차 성전시대의 예루살렘 모델

테오필로 2023. 8. 13. 15:25

아래 링크를 클릭하면 이스라엘 박물관에서 만든 헤로데의 예루살렘 건축물들을 볼 수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gSUwJ-N0Soo&t=31 

사해 사본을 전시하고 있는 '책의 전당'(위쪽)과 제2차 성전시대의 예루살렘 모델 (아래쪽).

 

전망대 : 1-동쪽, 2-남동쪽, 3-남서쪽, 4-서쪽

모델은 제일 먼저 1번의 동편에서 시작하는것이 좋다. 1번의 위치는 마치 올리브 산 위에서 예루살렘 대성전을 마주하면서 조망하는 느낌을 준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1번과 성전산 사이로는 북에서 남쪽으로(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키드론 계곡이 흐른다. 네 곳에는 도면에 번호를 부여하여 건물들의 위치와 이름들을 소개하고 있다.

1번. 성전 동편에서 바라본 모습
2번. 성전 남동편에서 바라본 모습

3. 남서쪽 전망대. 윗도시를 전망하기 좋은곳

4. 서쪽. 골고타 위치를 보기에 좋은곳
 

제2차 성전시대의 예루살렘 모형도

5. 성전(The Temple), 6. 바실리카(Basilica), 7. 안토니아 요새(Antonia Fortress), 8. 수산 성문(Shushan gate), 9. 이스라엘 연못(Pool of Israel), 10. 양 연못(Sheep Pool), 11. 알렉산더 얀네우스의 무덤(Tomb of Alexander Jannaeus), 13. 실로암 연못(Siloam Pool), 14. 아랫도시(Lower City), 15. 테오도토스 회당(Theodotos Synagogue), 16. 아디아베네 황실 궁전(Adiabene Palaces), 17. 훌다 여예언자의 무덤(Tomb of Huldah the Prophetess), 18. 훌다 성문(Huldah Gates), 20. 헤로데의 궁전(Herod's Palace), 21. 윗 도시 시장-아고라(Upper Market - Agora), 22. 대사제 카야파의 궁전(Palace of Caiaphas, the High Priest), 23 다윗왕의 무덤(David's Tomb), 24. 하스모니안 궁전(Hasmonean Palace), 25. 극장(Theater), 26. 로빈슨 아치(Robinson's Arch), 27. 윌슨 아치(Wilson's Arch), 28. 제3차 성벽(Third Wall), 29. 프세피누스 망대(Psephinus Tower), 30. 여인들의 망대(Women's Towers), 31. 목재 시장(Timber Market), 32. 제2차 성벽(Second Wall), 33. 골고타(Golgotha), 34. 요한 히르카누스의 무덤(Tomb of John Hyrcanus), 35. 망루 연못(Towers' Pool), 36. 성채와 망루들(The Citadel and Towers), 37. 첫번째 성벽(First Wall), 38. 서쪽 벽(The Western Wall).

 

다윗이 예루살렘을 지파의 중심지로 정한 기원전 1000년경부터 지금까지, 예루살렘 역사에서, 도시 문명적 차원에서 가장 화려한 절정을 이루었던 시기는 제1차 유다 독립 전쟁(66-70 AD)이 일어나기 직전인 기원후 66년경일 것이다. 이때는 헬레니즘과 로마문명이 어우러져 꽃을 피울 때였다. 이 때의 예루살렘 인구는 대략 5만에서 8만 사이였으며 그 크기(450 에이커)는 오늘날 구도심의 두배였다.

그러므로 오늘날 보여지는 예루살렘 시가지와 이때는 사뭇 다른 풍경이었을 것이다. 로마제국에 의해서 파괴된것은 예루살렘 성전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이라는 도시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의 최고 전성기를 보고자 했던 이가 있었으니 Holy Land Hotel의 소유주였던 은행가 한스 크록(Hans Meir-Zvi Kroch, 1887-1970)이다. 

독일에서 태어난 한스 크록은 1938.11.9일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어 1939년까지 감금되었다. 그의 아내 Ella는 수용소에서 살해되었고, 1942년 그와 그의 아들 그리고 세 딸은 아르헨티나로 탈출하였다. 그의 아들 Jacob Ernst Kroch1945년 팔레스티나로 이주하였는데 19487.7일 이스라엘 독립전쟁에서 이집트 군에 대항하다 Nitzanim 키부츠에서 전사하였다. 아들이 전사한 3년 후 한스 크록은 예루살렘으로 떠나와 Bayit Vagan(정원 안의 집이라는 뜻) 근교의 언덕을 매입한 후 1959년 그곳에 Holy Land Hotel을 지었다. 그리고 그의 아들 Jacob을 추모하기 위하여 1962년 제2차 성전시대의 예루살렘 모델 제작을 의뢰하였다.

고대 예루살렘 전문가, 역사가이자 지리학자인 히브리대의 Michael Avi Yonah(1904-1974) 교수는 고고학과 지형학적인 원천 자료를 바탕으로 그가 죽은 1974년까지 모델의 제작과 복원을 책임졌다. 아비 요나 교수는 이미 로마와 비잔틴 고고학의 선두 주자로서 평판있는 이었다. 아비 요나는 런던 대학에서 고대 역사와 예술, 고고학을 수학하였다. 영국 위임통치기간 팔레스티나 고대 유물 부서 책임자로 일하고 건국후 히브리대 교수를 역임하였다. 아비 요나는 예루살렘과 지중해 카이사리아의 고고학 발굴을 이끌었고 학생들을 양성하였다. 2차 성전시기이의 예루살렘 모델은 도시의 역사와 고고학 그리고 고대 예술에 대한 그의 개인적인 관심 등 아비 요나의 광대한 지식이 함께 가져온 영감받은 창조물이다. 

성전 모델에서 가장 중요한 원천 자료는 성경, 탈무드, 미쉬나 등 전승 자료들이었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료는 동시대 예루살렘 출신 역사가인 요세푸스 플라비우스(Josephus Flavius, 37-? AD)의 작품들(유대 전쟁사, 유대 고대사)이었으며, 역사적 자료들인 예루살렘에서 발견된 고고학적 유물들에 의존했다. 아비 요나의 사후에는 그의 아내 Eva Avi-Yonah 여사가 대부분 건물들의 도면과 건축상의 상세도를 그렸지만 모델의 과학적인 관리와 복원은 히브리 대학의 Yoram Tsafrir(1938-2015)에 의해 이루어졌다.

예루살렘의 제2차 성전 모델은 작업을 시작한지 4년만에 Holy Land Hotel 부지에 만들어져 1966년 일반에 공개되었다. 이 모델의 중요성은 학자들과 학생들 모두에게 엄청난 관심을 끌게 되었고, 관광 명소가 되었다. 당시 예루살렘 올드시티는 요르단 왕국의 지배하에 있었기에 이스라엘인들의 접근이 불가능했다. 모델이 일반에게 공개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6일 전쟁(1967.6.5-6.10)이 발발했고, 이때부터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그 후 올드시티에 대한 광범위한 고고학 발굴이 이루어졌고, 2차 성전에 대해서 엄청난 지식을 확장할 수 있었다.

예루살렘의 제2차 성전 모델은 예루살렘이 그 영광의 절정이었던 기원 후 66년 시기 도시를 1:50(2cm=1m) 축척 모형으로 재현한 것이다. 주재료는 고대에 이용했던 것과 똑같은 현지의 석회암과 대리석 그리고 도자기와 구리, 철과 금을 이용했다.

Holy Land Hotel 지역에 대한 새로운 건설 계획으로 모델을 이전해야 하는 상황에서 적합한 부지로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것은 성전 모델과 예루살렘 구도심을 함께 조망할 수 있는 위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Mt. Scopus, Ramat Rachel, Armon Hanatziv 전망대, 러시아인 구역 등이 거론되었지만 결국엔 바로 한 해 전에 완공된(1965년 4월 20) 사해 사본을 전시하고 있는 '책의 전당' 이 있는 이스라엘 박물관이 확정되었다. 이렇게 모델이 공개된지 40년이 지난 200675일 모델은 '책의 전당'의 서쪽으로 이전하였다.

모델은 이전을 위해 1000여개의 조각으로 자르고 나중에 다시 조립하였다. 안토니아 요새는 13톤이나 되는 구조물을 통째로 옯겼고, 가장 힘든 부분은 1만 4천개나 되는 점토타일로 복원된 바실리카였다고 한다. 홀리랜드 호텔은 모델 이전에 350만 달러를 지출하였다.

주목할만한 구조물들은 성전산과 헤로데 성전, 다윗 도시(여부스족의 성읍), 키드론 계곡, 벳자타 연못, 안토니아 요새, 실로암 연못, 헤로데 궁전, 아랫도시와 윗도시, 알렉산더 얀네우스의 무덤, 다윗 왕의 무덤, 훌다의 무덤, 골고타, 주요 탑들 등

 

솔로몬이 지은 제1차 성전은 기원전 968년 모리야 산 위에 주님의 집을 짓기 시작하여(1열왕 6,1) 7년의 기간을 거쳐 기원전 961년에 완공 하였다. 그러나 기원전 587년 바빌론의 네부카드네자르의 포위 공격에 불태워 졌고 이스라엘 백성은 바빌론으로 유배를 당해야 했다. 바빌론을 정복하고 페르시아 제국의 왕으로 등극한 키루스 대왕(Cyrus the Great, 551-529 BC 재임)은 종교적인 관용정책(2역대 36,22-23)인 '키루스 칙령'(기원전 538년)을 반포하였다. 이에 즈루빠벨(Zerubbabel)을 주축으로 42,360명의 유대인들이 귀환하게 되었다(에즈 2,1-2.64). 이들은 하느님의 집으로 돌아온 이듬해 둘째 달에, 성전 재건 공사를 시작하였다(에즈 3,8; 5,2 참조).

토착민들과 사마리아인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즈루빠벨은 성전이 무너진지 70여년 만에 그리고 바빌론에서 귀환한지 20년쯤 되는 기원전 515년(에즈 5,15-16)년, 다리우스 임금의 통치 제6년인 아다르 달 초사흩날에 성전을 완공하여 봉헌하였다.  이때부터 제2차 성전시대가 시작되며 로마제국이 예루살렘을 파괴하는 서기 70년까지 이어진다.

이 시대의 주요한 시대적 구분은 다음과 같다.

  • 페르시아 : 539-333 BC
  • 헬레니즘 : 333-164 BC
  •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이집트) : 301-200 BC
  • 셀레우코스 왕조(시리아) : 200-164 BC
  • 하스모니아 왕조 : 164-37 BC
  • 헤로데 대왕과 가족 : 37 BC-6 AD
  • 로마제국  : 6-70 AD

 

하까이 예언서에 의하면 "이 집의 새 영광이 이전의 영광보다 더 크리라."(하까 2,9)고 이야기 하지만 제1차 성전에 비하면 아주 볼품없는 규모였을 것이다. 아직도 성벽은 여전히 허물어져 있었고, 성문은 불탄채였다(느헤 1,1-4 참조). 그러기에 바빌론 탈무드(Yoma 21b; 7)에 의하면 제1차 성전에 머무르던 셰키나(Shekhina-하느님의 거쳐 또는 하느님의 신성한 임재를 의미)나 성령(Ruach HaKodesh)이 2차 성전에는 부재 했다고 한다. 이 하느님의 거룩한 영 셰키나는 성전 동편에 있는 올리브 산에 머물면서 메시아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므로 성전과 올리브 산 사이에는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그리고 무슬림들의 공동 묘지는 하느님의 영이 머무르시는 곳이기에 최고의 명당 자리가 되는 것이다.

기원전 333년 알렉산더 대왕이 유대 지방을 점령함에 따라 기원전 200년까지는 이집트 왕국의 일부가 되었다. 그러나 Paneion 전투에서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조(Seleucid) 안티오쿠스 3세(Antiochus III the Great)가 이집트 파라오 Ptolemy V를 물리치면서 시리아의 지배가 시작되었다.

기원전 167년 Antiochus IV Epiphanes는 성전에 제우스 신상을 세웠고 유대교를 박해하며 유다의 헬레니즘화에 열을 올린다. 이때 마카오베오 형제들이 분연히 일어나 세레우코스 왕조에 반기를 들었고 대 제국에 항거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이 때 성전을 정화하게 되는데 이것을 기념하여 생긴 유대 명절이 하누카(봉헌) 축제이다. 이로써 하스모니아 왕조가 들어선다. 그러나 기원전 63년 예루살렘은 Pompey에게 점령되었다.

 

빨강 : 제1차성벽, 초록 : 제2차성벽, 노랑 : 제3차성벽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예루살렘의 구시가지 성벽은 제2차 성전 시대의 예루살렘 모습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지금의 성벽은 1537~1541년 오스만 튀르크의 슐레이만 1(1520-1566 재임)의 명에 의해 지어졌다. 성벽의 길이는 4,018미터이고 평균 높이는 12미터이며 평균 성벽 두께는 2.5미터이다. 그러나 제2차 성전 시대의 예루살렘은 오늘날의 두 배였다.

1차 성벽

요세푸스가 옛 성벽이라고 부르는 첫 번째 성벽은 오늘날 윗도시인 시온산 지역과 아랫도시인 다윗 도성까지 아우르는 지역이다. 기원전 2세기 후반에 하스모니안 왕 중 한 사람에 의해 지어졌다.

2차 성벽 

2차 성벽은 오늘날 다윗 도성이 있는 자파 게이트에서 시작된다. 이 성벽은 헤로데 대왕 때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일부 학자들은 하스모니아 왕 알렉산더 얀네우스(기원전 103-76)가 건설했다고 하는 이들도 있다. 2차 성벽은 1차 성벽의 북쪽으로 발달한 주거 및 상업 지역을 보호하기 위해 설계되었다. 예수님께서 수난을 당하던 시기는 제2차 성벽까지 만들어졌던 시기로 모델에서 볼 수 있듯이 당시 골고타는 제2차 성벽 밖에 있다.

3차 성벽

요세푸스에 의하면 도시의 인구가 팽창해 가자 서서히 북쪽 성벽 너머로 주거단지가 형성되어 갔고, 이곳을 신도시’(new city)라고 불렀다.

지형학적인 면에서 예루살렘을 보면 동쪽은 키드론 계곡, 남쪽은 키드론과 힌놈 그리고 중앙의 티로포에온 계곡이 합쳐지는 경사면이고 서쪽으로는 힌놈계곡이 천연의 방어 지형인 데 반해, 북쪽 지역은 평평한 구조로서 외부의 침입이 용이했기 때문에 2차 성벽에서 3차 성벽으로 확장해 나갈 수밖에 없었다그리고 오늘날 자파 성문에 해당하는 지점인 1, 2, 3차 성벽이 유일하게 만나는 서쪽의 중앙 지역은 헤로데의 궁전과 윗도시를 방어하기 위함이었다.

3차 성벽은 헤로데 대왕과 하스모니안 공주 마리암메의 손자인 아그리파 1(Agrippa I, 서기 40~44)가 요새화되지 않은 지역에 사는 것이 불안하다고 느꼈던 신도시 주민들의 청원을 받아들여 건설하기 시작하였다성벽의 기초가 놓인 후 아그리파는 로마에 대한 바란 음모를 피하려고 공사를 중단해야 했지만, 성벽 공사는 제1차 항쟁이 있기 직전에 신속하게 마무리되었고, 성전 모델에서는 바로 이 시기를 재현해 놓은 것이다. 3차 성벽은 로마 티투스 군단에 예루살렘이 포위된 2주 후 제일 먼저 함락되었다.

요세푸스는 제3차 성벽을 하나의 걸작이라고 평가하면서 북서쪽에 있는 프세피누스 망루는 더욱 놀라운 것이었다고 전한다. 3차 성벽은 매 100미터 간격으로 90개의 망루가 설치되었다고 이야기하면서 여인들의 망루 성문하나만을 언급한다.

 

1. 여부스족의 성읍; 2. 실로암 연못; 3. 기혼샘-키드론 계곡에 나 있는 샘물을 히즈키야 왕이 도성 안쪽으로 물길을 내어 끌어들인것이 히즈키야 터널

위 도면에서1번은 여부스족의 땅. 여부스족의 땅은 12지파에 분배되지 않은 땅이었다. "벤야민의 자손들은 예루살렘에 사는 여부스족을 쫓아내지 않았다. 그래서 여부스족이 오늘날까지 예루살렘에서 벤야민 자손들과 함께 살고 있다."(판관 1,21)

이 땅을 다윗은 그의 부하들을 거느리고 올라가서 여부스족의 성읍을 점령하였다. 다윗은 점령한 이 시온산성을 '다윗 성'이라고 명하였다(2사무 5,6-9; 1역대 11,4-7).

2사무 5,6 (다윗이 예루살렘을 점령하다다윗 임금이 부하들을 거느리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그 땅에 사는 여부스족을 치려 하자, 여부스 주민들이 다윗에게 말하였다. “너는 이곳에 들어올 수 없다. 눈먼 이들과 다리저는 이들도 너쯤은 물리칠 수 있다.” 그들은 다윗이 거기에 들어올 수 없으리라고 여겼던 것이다. 7 그러나 다윗은 시온 산성을 점령하였다. 그곳이 바로 다윗 성이다. 8 그날 다윗이 이렇게 말하였다. “누구든지 여부스족을 치려는 자는 지하 수로로 올라가, 이 다윗이 미워하는 저 다리저는 이들과 눈먼 이들을 쳐라.” 여기에서 “다리저는 이와 눈먼 이는 궁 안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이 생겨났다. 9 다윗은 그 산성에 살면서, 그곳을 ‘다윗 성’이라고 하였다. 다윗은 밀로 안쪽으로 성곽을 둘러쌓았다.

1역대 11,4 (다윗이 예루살렘을 점령하다) 다윗이 온 이스라엘을 거느리고 예루살렘 곧 여부스로 갔다. 그곳에는 그 땅의 주민 여부스족이 있었다. 5 여부스 주민들이 다윗에게 말하였다. “너는 이곳에 들어올 수 없다.” 그러나 다윗은 시온 산성을 점령하였다. 그곳이 바로 다윗 성이다. 6 그때에 다윗이 말하였다. “누구든지 제일 먼저 여부스족을 쳐 죽이는 이가 우두머리와 장수가 될 것이다.” 그러자 츠루야의 아들 요압이 제일 먼저 올라가 우두머리가 되었다. 7 다윗은 그 산성에 살았다. 그리하여 그곳을 다윗 성이라고 하였다.

다윗 도시의 크기는 12.3에이커(49776㎡)로  축구장의 면적(약 7140㎡)의 7배 정도이다. 축구장의 약 406배인 여의도의 면적과 비교해 보면 다윗이 시작한 예루살렘의 크기를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성전산(The Temple Mount)
성전산(The Temple Mount)-2

 

헤로데의 제2차 성전 건축에 대한 경위를 밝히고 있는 유대고대사는 내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완전한 성전을 하느님께 지어 드림으로써, 내가 이 왕국을 주시는 등 한없는 은혜를 베푸신 하느님께 가장 경건한 방법으로 감사하고자 하는 것”(유대 고대사 제15111)이라고 전한다.

성전 건축을 위해 헤로데는 석재를 운반할 마차 1,000대와 건축 숙련공 10,000명 그리고 사제만이 들어갈 수 있는 성전 건축을 위해 1,000명의 사제들을 뽑아 석수와 목수로 교육하여 건설에 참여시켰다.

그러므로 헤로데의 수많은 건축물 중 성전산 건설은 그의 최고의 걸작이다.

모리야 산은 북쪽으로 평평한 고원지대를 가지고 있는데 반면 남쪽으로 급격한 경사를 이루는 구조이다. 헤로데는 이런 산등성이의 지형을 산 전체가 엄청난 크기의 사각형 무대로 바꾸는 것이었다. 산 주변을 깎아내고 엄청난 크기의 돌덩어리들을 지반공사에 사용하였는데 그중 어떤 것은 100톤의 무게가 넘고, 가장 큰 돌의 크기는 13.6m x 3.4x x 5.0m의 크기에 이른다.

헤로데의 성전 확장은 북쪽, 서쪽 그리고 남쪽으로 이루어졌다. 암석 덩어리와 옹벽(아직도 거의 손상되지 않고 그대로 보존된)을 이용하여 그의 건축가들은 언덕 꼭대기의 높이에서 평평하게 하여 거의 145,687(축구장 20)의 엄청난 규모의 대지를 만들었다.

새로운 광장의 크기는 동쪽으로 470m 남쪽으로 280m 그리고 서쪽으로 485m로 처음의 두 배로 확장한 것이다엄청난 크기로 성전 뜰을 확장했는데, 유대인들의 3대 의무 축일인 과월절, 오순절 그리고 초막절은 성전 순례가 의무였기 때문에 수천 명의 순례객들에서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서였다.

공사는 기원전 20년에 시작하여 9년 반 만에 완공되었다. 8년은 성전산의 높은 대지를 만드는데 소요되었고, 16개월은 사제들의 손에 의해 성전 건물 그 자체를 위해 소요되었다.

바빌론 탈무드는 헤로데를 좋아하지 않는 유대인 현자들조차도 헤로데의 성전을 본 적이 없는 사람은 그의 평생 아름다운 건물을 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고 언급할 정도이다.

헤로데는 성전을 봉헌하면서 감사의 마음으로 수소 300마리를 봉헌하였다.

 

5. 성전(The Temple)

2차 성전 시대의 예루살렘 모델 안에서 성전 건물은 성전산의 중앙에 자리하고 있다. 성전산은 크게 이방인들이 들어갈 수 있는 구역이 있었고, 그 안쪽으로는 유대인들 구역이었는데 두 구역은 높낮이로 구분되었고 그 경계에는 경고판이 붙어 있었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쓰인 경고판을 지나 유대인 구역으로 들어가는 이방인들은 사형에 처할 것이라는 하였다. 이러한 표지의 일부분이 근처에서 발굴되어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사도행전 21,27-36은 성난 군중의 충돌은 바오로가 그리스인들까지 성전으로 데리고 들어와서 거룩한 장소를 부정하게 만들었다는 이러한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방인들이 성전 안으로 들어가면 사형에 처해질거라는 그리스어 비문, 서기 1세기, 석회암, 이스라엘 박물관

유대인 순례자들은 경고판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성전 경내로 들어갈 수 있었다. 경내의 동쪽 성문은 첫 번째 경내로 인도하는 아름다운 문이라고 하였는데, 남녀 모두가 모일 수 있었다. 이 이스라엘 뜰에는 제대에 사용할 나무, 기름과 포도주 저장소, 나지르인과 나병환자들을 위한 방이 있었다. 여인들의 뜰에는 순례객들은 마치 순례 시편의 개수와 같은 둥근 15계단을 올라간다. 레위인들은 이 계단 위에서 초막절의 끝에 특별한 예식을 위한 시편을 노래했다.

둥근 계단의 끝은 니카노르 성문이 있는데 성전의 성문중에서 가장 화려했다. 그것은 구리 문을 봉헌한 알렉산드리아의 니카노르(Nicanor)의 이름에서 딴 것이다. 다른 성문은 금으로 도금하였지만, 니카노르 문의 원래 구리 광택은 금처럼 빛났다고 전한다.

이 성문을 통하여 순례자들은 이스라엘 뜰로 들어간다. 여기서 그들은 성전 사제들에게 그들의 봉헌물을 바쳤고, 세 번째 뜰인 사제들의 뜰에 있는 제단에서 동물들이 도살되고 희생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뜰들 위로 높이 솟아 있는 성전 자체의 정교한 외관은 동쪽을 향하고 있다. 1차 성전에는 야킨(오른쪽)과 보아즈(왼쪽) 두 기둥이 있었다. 건물의 지붕은 삼각뿔 모양의 돌출부로 둘러싸인 구조로 만들었는데, 미쉬나에서는 이것을 허수아비라고 불렀다. 단어에서 암시하듯 희생 제사의 냄새가 까마귀나 다른 새들을 유혹하는 것을 격퇴하기 위한 실용적인 목적에 의한 것이었다.

성전 건물의 도면은 당대의 다른 성소와는 달랐다. 뒤쪽보다 앞쪽이 눈에 띄게 넓어서 현자들은 이것을 사자에 비유했다고 한다.

성전의 내부는 세 곳으로 나뉘어졌는데, 열려있고 비어있는 현관, 황금 제단과 일곱 가지의 촛대인 메노라 그리고 제사상(출애 25,23-30; 레위 24,5-9)이 모셔진 성소 그리고 가장 안쪽엔 거룩한 현존(Shekhina, 히브리어 성경שכינה)이 머무시는 지성소이다. 1차 성전 시기에 이 지성소는 대사제일지라도 1년에 딱 한 번, 대속죄의 날에만 들어갈 수 있었다. 1차 성전의 지성소엔 계약의 궤와 십계판이 모셔져 있었는데 제2차 성전 시기의 지성소는 비어있었다.

6. 바실리카(The Basilica)
6. 바실리카(The Basilica)-2

바실리카는 고대 로마에서 재판이나 공적인 집회에 사용한 큰 건물을 일컫는 단어이다. 이후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면서 자연스럽게 대성당이라는 의미로 굳어졌다.

성전산 남쪽의 엄청난 규모의 바실리카는 성전산 폭(넓이)으로 뻗었는데 신앙과는 관련 없는 건물이었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162개의 거대한 기둥이 떠받치고 있는 회랑은 4개의 열로 정렬되었고, 높고 넓은 중앙홀과 두 개의 통로가 있는 내부 공간으로 나뉘어졌다. 각각의 기둥은 세 사람이 손을 맞잡아야 할 정도의 크기였고, 고린토 양식으로 아름답게 꾸몄다. 유리섬유와 금 잎으로 씌워졌다.

이곳은 솔로몬의 궁전이 위치해 있었던 곳이며 비잔틴 시대에는 성모님께 봉헌된 대성당이었었다. 지금은 무슬림들의 알 악사(먼 곳의 사원) 사원이 위치해 있다.

 

7. 안토니아 요새(Antonia Fortress)
7. 안토니아 요새(Antonia Fortress)-2

예루살렘에서 헤로데의 첫 번째 건축사업은 성전산의 북쪽 모서리에 있는 육중한 요새였는데, 헤로데의 첫 번째 로마 후원자였던 마르코 안토니(Mark Antony, 82-30 BC)의 이름을 따서 안토니아 요새라 불렀다외관상으로는 일찍이 유배에서 돌아오던 기원전 6-5세기에 성전산 북쪽을 방어하기 위한 진지가 있던 곳에 하스모니안 왕조의 요한 히르카누스가 '바리스'라는 성채를 건설한 것이다. 

요세푸스는 안토니아 요새의 튼튼함과 아름다움을 격찬한다. 25미터 높이의 가파른 바위 절벽 위에 지어진, 요새 그 자체로는 20미터 높이로 네 모서리에는 각각의 망루가 있었다. 그중 남동쪽 망루는 35미터의 높이로 다른 망루들보다 우뚝 솟아 성전의 모든 영역들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고 전한다.

헤로데와 그의 가족들은 이곳에서 거의 10년을 살았다. 그리고 윗도시에 헤로데 궁전이 지어진 후 헤로데가는 새 거주지로 이사하고 안토니아 요새는 군대 시설로만 사용되었다.

기원후 66년 제1차 유대 항쟁이 일어나자 이틀간의 격전 후 유대 반군들의 손에 들어갔고 로마의 포위 공격을 막아내는 중요한 거점이 되었다. 로마군은 4년이나 지난 후에야 안토니아 요새를 점령할 수 있었고, 그 후 성전산을 손쉽게 정복할 수 있었다. 안토니아 요새는 로마군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다.

8. 수산 성문(Shushan Gate)

성전산의 동쪽에는 단 하나의 성문만이 있는데 모델에서 보면 키드론 계곡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다. 미쉬나에 의하면 이것을 동쪽 성문또는 수산 성문’(에즈 4,9-10; 느헤 1,1; 다니 8,2; 에스 1,2; 9,6)이라 한다. 수사(수산)은 바빌론 동쪽 320km 지점에 있는 옛 엘람의 수도인데, 유배에서의 귀환을 기념하기 위하여 페르시아의 수도에 있는 수산 왕궁의 형상으로 장식되었기 때문에 수산 성문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오늘날 이 성문은 황금 성문(Golden Gate)이라 부르는데 남쪽에 있는 성문은 '자비의 문'이고 북쪽에 있는 다른 문은 '참회의 문'이다. 유대인의 전승인 미쉬나에 의하면 다시 오실 메시아는 올리브 산쪽에서 이 성문을 통하여 예루살렘에 입성할 것이라고 한다. 그리스도인들과 무슬림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이 성문을 통하였다고 믿는다.

 

10. 양문(Sheep Pool)-벳자타 연못(Poo of Bethesda)

이 한 쌍의 물 저수지는 오늘날 사자 성문(성 스테파노 성문) 근처에 있다. 북쪽의 연못은 제1차 성전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남쪽 연못은 헬레니즘 시대에 추가된 것이다.

양들의 연못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성전에 봉헌될 양들을 이곳에서 씻었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며, 기원전 5세기 느헤미야의 성벽이 지어질 때 근처에는 양들의 문이 있었다. 그리고 제2차 성전 시대의 끝 무렵인 기원후 1세기에는 원래의 성벽 밖에 신도시의 양 시장이 들어섰다.

요한복음은 이곳 벳자타 못 가에서 병자를 고치신 치유 표징을 전한다(요한 5,1-9). "예루살렘의 '양 문' 곁에는 히브리 말로 벳자타라고 불리는 못이 있었다"(요한 5,2).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북쪽에 있는 이 연못에서 서른여덟 해를 앓고 있는 이를 치유해 주셨다. 벳자타라는 단어는 히브리어와 아람어에서 유래하는 말로 '자비의 집'이라는 뜻이다.

 

실로암 연못은 다윗 도성의 서남쪽 끝에 있다. 티로포에온 계곡의 끝지점으로 예루살렘에서 가장 낮은 아랫도시의 해발 625미터인 키드론 계곡 쪽에 있다.

실로암 연못은 히즈키야 왕이 통치하던 시기인 기원전 715-687/6년에 기혼 샘에서 도성 안으로 물을 끌어들이기 위해 파 놓은 인공 저수지이다. 히즈키야는 아시리아 임금 산헤립이 쳐들어오자 도성 밖에 있는 샘들의 물줄기를 막고(2역대 32,2-4) 성 밖에 또 다른 성벽을 쌓았다. 이 시기에는 벳자타 연못은 '윗 저수지'(2열왕 18,17; 이사 7,3)라고 부르고 실로암 연못은 '아랫 저수지'(이사 22,9)라고 불렀다. 예수님께서는 이곳 실로암 연못에서 태생 소경을 치유해 주셨다(요한 9,1-41 참조).

모델에 표시된 실로암 연못은 비잔틴 시대에 지어져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2005년에 다윗성의 남쪽 끝에서 오수처리장을 보수 공사하면서 제2차 성전 시대의 거대한 연못이 드러나게 되었다. 복원 결과 60m x 50m의 크기로 연못은 사방으로 넓은 계단들로 둘러싸였고, 수많은 사람이 쉽게 물에 들어갈 수 있는 구조였다. 성전산으로 오르기 전에 순례자들은 이곳에서 mikveh(정결례)를 거행하기 위한 목적으로 도시의 남쪽에 엄청난 규모의 공용 정결례 연못을 만들었다.

탈무드에 의하면 예루살렘에 연중 순례를 온 이들이 이곳 실로암 연못에서 정결례를 행하고 성전으로 향하는 시작 장소였다고 한다. 유대교 자료에 의하면 가장 귀중한 기혼 샘에서 흘러나온 물이기 때문에 정결례용으로 가장 순수한 물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연못의 북쪽에서 고고학자들은 기둥들이 늘어서 있는 일종의 산책로와 같은 광장을 발견했다. 이 광장은 성전산을 향해 티로포에온 계곡을 오르는 포장된 계단식 거리와 서쪽으로 연결되어 있다. 모델은 아치형 지붕이 있는 아랫도시 시장 상가들이 계곡 양쪽에 늘어선 모습을 제시한다. 거리의 서쪽 부분은 19세기 후반에 Bliss Dickie에 의해 발견되었다.

 

아랫도시는 전망대 2번 위치인 동남쪽에서 보면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성전산에서 남쪽으로 좁고 길쭉하게 돌출된 부분은 여부스족의 요새를 다윗이 정복하여 다윗 도시로 명명한 곳으로 오른쪽으로는 키드론 계곡, 왼쪽으로는 티로포에온 계곡(Tyropoeon, 치즈 제조업자들의 골짜기라고도 부름)으로 경계 지운다.

여부스족은 기원전 3700년경 기혼샘이 위치한 이곳에 정착하여 여부스족의 요새를 만들었다. 다윗왕은 기원전 1000년경 여부스족의 성읍을 점령하여 그의 도읍으로 만들었는데 이 크기는 대략 60,703로 축구장의 8.5배 크기였다. 그의 아들 솔로몬은 북쪽 모리아 산까지 두 배로 확장하였고 그곳에 그의 왕궁과 첫 번째 성전을 지었다.

요세푸스는 아랫도시가 있는 다윗도성을 아크라(Acra)’라고 불렀다. 돌출부의 위쪽 부분, 아크라와 성전산 사이에는 오펠’(2열왕 5,24; 2역대 27,3; 느헤 3,26 )이 있다. 훌다의 묘지가 있는 곳이다.

모델에서 아랫도시는 시온산의 극장 아래쪽 그리고 티로포에온 계곡 왼쪽의 경사면에 밀집된 전통적인 아랍 마을을 닮은 모습을 하고 있다. 이 구역의 작고 밀집된 집들과 위쪽 도시의 엄청난 규모의 정리 정돈된 저택들과 대조를 이룬다.

요세푸스는 서기 66년의 소요가 아랫도시에 집중되었다고 말한다. 반란의 주동자들은 대부분 하층민이었기에 유대인 사회의 극심한 양극화, 즉 아랫도시는 하층민들이 그리고 윗도시는 상류층들이 사는 모습을 반영하였다.

항쟁의 마지막에 로마 티투스 군단에 의해 예루살렘이 불태워지는 것을 묘사한 요세푸스는 아랫도시의 주요 건물들의 목록을 제시한다. 아크라, 평의회실, 오펠 그리고 아크라 안의 여왕 헬레나의 궁전이다. 그리고 첨가하기를 집들과 도로가 불태워졌는데 기근으로 희생된 이들이 싸여있는 도로도 불태워졌다고 전한다.

돌출부의 바닥에 있는 수원 기혼샘, 그것이 흘러 들어간 실로암 연못 그리고 힌놈 골짜기로 내려간 지점에 있는 엔 로겔’(여호 18,16)은 아랫도시의 주요한 수원지였다.

 

 

테오도토스 회당은 다윗 도성의 제일 아래, 아디아베네 궁전의 남쪽과 성벽 사이에 붉은 타일 지붕으로 구분된다모델의 이 위치에 회당이 포함된 것은 예루살렘에서 일찍이 만들어진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1913~1914년 프랑스 출신의 유대인 고고학자인 Raimond Weill은 다윗 도성의 고고학 발굴을 주관하는 동안 물 저장소에서 서기 1세기의 회당으로부터의 그리스어 비문을 발견하였다.비문이 발견된 물 저장소와 함께 Weill은 바위를 깎아 만든 계단들과 회반죽이 되어 있는 벽면들을 발굴했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정결례를 위한 Mikveh(입욕 시설)로 예루살렘에서 발견된 큰 것 중의 하나였다. 이것은 아마도 비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정결례 시설의 일부분일 것이다. 그렇다면 회당 자체가 정결례를 위한 입욕 시설에 인접해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테오도토스 비문은 이 시기 예루살렘과 성전 주변에 회당이 있었다는 유일한 증거는 아니다. 그러나 성전이 아직 존재하던 시기에 회당이 종교적이고 사회적인 역할을 전해주는 소중한 유물이다. 성전이 로마군에 파괴된 후 회당은 점진적으로 성전을 대신하는 기관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예루살렘의 이스라엘 박물관에는 예루살렘 테오도토스 회당에서 발견된 고대 그리스어로 쓰여진 헌정 비문이 전시되어 있다. 이 비문은 회당장의 손자이자, 사제이고 회당장인 베테누스의 아들 테오도토스가 "율법을 읽고 계명들을 가르치기 위해" 회당을 재건하였으며 외국으로부터 오는 순례자들의 숙식을 제공하기 위한 목적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탈무드에 의하면 "예루살렘에는 480개의 회당이 있는데 성경 학교와 미쉬나 연구를 위한 특수학교들이 있었지만 로마 베스파시아누스에 의해 파괴되었다."(메길라 3b)고 전한다.

테오도토스 회당 비문 : 이스라엘 박물관 소장, 기원전 1세기 작품, 75cm x 41cm 크기석회암, 그리스어 비문, 성전산 근처에서 발굴

 

아랫도시의 가난한 집들과는 다르게 다윗 도성의 경사면에 등장하는 네 개의 화려한 건물들은 대조를 이룬다. 내부 안뜰, 응접실 그리고 치장벽토 벽이 선명하게 보인다.

건축 형식은 서기 1세기 아디아베네를 통치한 헬레나 여왕과 그 가족의 동방에서의 기원을 드러내기 위해, 파르티안 제국의 스타일로 지어졌기 때문에 예루살렘의 도시 경관과는 사뭇 다르다. 헬레나는 파르티아 제국(카스피 해 남동쪽, 현재 이란 북부에서 투르크메니스탄 남부 일대) 이자테스의 딸이요 아디아베네의 황후였다. 유대인 상인들의 만남을 통해 헬레나와 그의 아들들은 30년경 유대교로 개종하였고, 예루살렘으로 이주하였다. 탈무드 전승에 의하면 헬레나는 성전과 도시 주민들의 복지를 위해 엄청난 기금을 봉헌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녀는 사랑과 의로움의 모범으로 여러 세대에 걸쳐 기억되었다.

훌다는 2열왕 22,14-20 그리고 2역대 34,22-28에서 언급하고 있는 여예언자이다. 훌다는 하르하스의 손자이며 티크와의 아들인 살룸 예복 담당관의 아내로 예루살렘 신시가지에 살고 있었다. 솔로몬 성전을 복원하는 동안 법전이 발견되자 요시아 왕은 힐키야 사제, 사판의 아들 아히캄, 미카야의 아들 악보르, 사판 서기관, 그리고 임금의 시종인 아사야에게 명령하여 훌다 여예언자에게 가서 하느님의 뜻을 알아보게 하였다(2열왕 22,12-20).

훌다는 성전산의 남쪽에 뭍혔고, 훌다의 무덤이 있는쪽의 성문을 훌다 성문이라고 하였다. 유대 전승에 의하면 훌다의 무덤은 예루살렘의 성벽 사이라고 하지만 중세에는 훌다의 무덤이 올리브 산 위의 모스크 아래 벽을 깍아 만든 동굴에 안치되었다고 전해진다.

성전산의 남쪽 부분은 제2차 성전 시대 예루살렘 모델이 만들어질 때 아직 고고학 발굴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당시의 추정은 아랫도시가 확장된 곳이었을 거라는 것이었고 그래서 하류층들의 거주지인 가난하고 작은 집들로 채워져 있었다. 그런데 19676일 전쟁 후 1970년대에 광범위한 고고학 발굴을 통해서 도시의 모습은 완전하게 변하였다. 이곳은 성전산에 오르기 전 수많은 순례자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한 공용 공간이었다.

오직 사제들과 성전에서 봉사하는 이들만이 윗도시에서 직접 성전산에 윌슨 아치를 통해서 들어갈 수 있도록 허가 되었고 다수의 다른 사람들은 남쪽 구역을 통해서 성전으로 접근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오펠 지역에는 순례자들이 이용할 수 있는 많은 정결례용 욕조 시설들이 마련되었다. 미쉬나에에 의하면 오펠 지역은 경사면이었으므로 성전산 남쪽 성벽으로 오르기 위해서 기념비적인 계단들을 통해서 오를 수 있었고, 성벽은 두 세트의 성문이 있었는데 이 성문을 훌다 성문이라고 하였다. 성문으로 들어서면 성문 내부에서 올라간 지하 계단은 바실리카와 성전 사이에 있는 성전산 뜰로 들어간다.

 

알렉산더 대왕의 출현 이후의 예루살렘은 그리스-로마 문화의 영향 속에 있었다. 예루살렘 성전은 성전으로서의 고유한 특성을 간직하고 있었을지라도 왕들과 그의 후계자들은 앞다투어 예루살렘을 헬레니즘화 하였다.

하스모니아 시대에 예루살렘은 이미 그리스 문명에 심취하여 헬레니즘화 되어 갔다. 더구나 특별히 헤로데의 시기에는 로마 문화가 그대로 이식된다.

남서쪽 전망대(3번 위치)에서 모델을 바라보면, 모델과 사이의 경계는 힌놈계곡이 있다. 마주하는 깊은 계곡 위의 능선을 시온산의 서쪽 언덕이라 하는데 해발 770m 높이이다. 윗도시는 제1성전시기(8-7 BC)가 끝나는 시기에 언덕 위에 처음 건물이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기원전 2세기 후반에 하스모니아 왕조가 이곳에 정착하기 시작하면서 급속히 발달하였다. 평평하고 상대적으로 넓은 면적-능선의 꼭대기에-는 사제가문과 왕실의 주거지인 신도시의 위치로서 이상적이었다. 그 크기가 647,498에 이르게 되었는데 이 서쪽 언덕을 제2차 성전 시기에 윗도시라 부르게 되었다.

모델에서 재건축된 윗도시는 그리스-로마 문명화된 모습을 확연하게 보여준다. 마치 고대 로마의 부유한 집들처럼, 주택들은 크고 중앙광장 주위로 격자 모양으로 꼼꼼하게 계획된 모양을 하고 있다.

지난 시기의 일부 학자들은 그렇게 밀집한 산 위의 도시에 그처럼 화려한 집들이 지어졌을 거라는데 의문을 제기한 이들이 있었지만, 고고학 발굴로 증명되었다. 오늘날 유대인 구역인 윗도시의 발굴은 모델이 완공된 이후에 실행되었는데 장엄한 저택들이 드러났다.

더군다나 제2차 성전 시대에는 도시의 물 공급망이 대폭 향상되었는데, 베들레헴의 남쪽에 있는 샘에서 긴 거리의 수로를 통해 성전과 윗도시에 보내졌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의 헤로데 궁전은 1세기 말에 지어졌다. 헤로데 대왕은 기원전 37년부터 기원후 4년까지 유다를 통치했다. 예루살렘의 윗도시의 북서쪽에 자리한 헤로데의 궁전은 예루살렘에서 성전 다음으로 중요한 건물이었다. 헤로데의 예루살렘 궁전은 그의 주된 주거 장소였지만 지중해 카이사리아, 헤로디온, 마사다 그리고 예리코의 겨울 궁전과 같이 여러 장소에 궁전을 두었었다. 예루살렘 궁전은 오늘날 '다윗의 성채'로 부르는 둘러 쌓여진 성벽만 남아 있을 뿐이고, 오늘날은 '다윗성의 박물관'( Tower of David Museum)과 경찰서로 사용되고 있다. 오늘날 자파 성문에서 시온 성문으로로 연결되는 아르메니안 구역 안에 있다. 

헤로데의 궁전은 윗도시에서 다른 어떤 건물들보다도 가장 크고 장엄했다. 그것은 15m 높이의 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일정한 간격으로 장식된 망루가 있는 직사각형 단지였다. 헤로데는 이곳의 지형적 이점과 북쪽에 있는 세 개의 망루가 있는 성채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이 위치를 선택했다.

왕실은 안토니아 요새에서 약 10년 동안 거주한 후 기원전 23년경 이곳 궁전으로 옮겨왔다. 요세푸스가 묘사한 것처럼 헤로데는 궁전 건축에 사용할 수 있는 최고의 재료와 기술을 사용했다. 거대한 주랑과 객실에는 모두 100개의 침실을 갖추었고 여러 나라에서 수많은 희귀한 돌들을 가져와 장식하였다. 모든 가구가 호화롭게 갖추어졌고, 집기들은 금과 은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긴 산책로와 깊이 흐르는 수로와 물을 뿜어내는 연못들로 꾸며졌다.

헤로데 궁전은 양쪽 끝 좌우 건물들은 성전과 결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가장 크고 아름답게 지어 그의 고귀한 친구인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리아(Augustus Caesar)와 그의 양아들 마르쿠스 아그립빠(Marcus Agrippa)에게 헌정하는 의미로 케사레움과 아그리피움이라고 불렀다

헤로데가 죽고 그의 후계자들이 추방된 후 왕궁은 로마 총독들이 예루살렘을 방문할 때 그들의 관저로 사용했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헤로데의 궁전은 예루살렘이 로마군에 의해 파괴되기 훨씬 이전인 유다 항쟁 초기에 안토니아 요새와 함께 불태워졌다.

따라서 궁전의 중요한 잔해를 찾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한 것으로 생각되었지만 다행스럽게도 성채 지역과 아르메니안 구역의 서쪽 가장자리에서 고고학 발굴을 통해 궁전의 거대한 기초 유적이 밝혀져 그 크기를 추정할 수 있게 되었다. 그 크기는 330m x 130m로 거의 44,515로 축구장 6개의 크기이다.

헤로데는 왕궁 북쪽에 비상시에 방어와 피난을 위한 3개의 거대한 망루를 세웠는데  친구의 이름을 딴 힙피쿠스(Hippicus), 그의 형제의 이름을 딴 파사엘(Phasael) 그리고 가장 사랑하는 아내 마리암메(Mariamme)의 이름으로 불렀다.

 

헤로데 궁전의 동쪽엔 예루살렘에서 가장 중요한 광장인 시민광장(Agora) 또는 윗도시 시장이 자리한다. 아고라는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에서 시민들이 자유롭게 토론을 벌이던 장소이다. 모델에서 아고라는 삼면이 붉은 기와로 덮인 현관으로 둘러싸여 있다. 도면은 튀르키예에 있는 헬레니즘 시대의 도시 시장을 모방한 것이다.

 

모델에서 대사제 카야파의 궁전은 헤로데 궁전의 남쪽에 있다. 대형 로마 저택 양식으로 지어졌는데, 내부 중앙에는 안뜰이 있는 정사각형 구조는 여러 법정으로 둘러싸여 있다.

카야파의 궁전은 예수님의 체포와 관련하여 신약성경에서 여러 번 언급된다그때에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카야파라는 대사제의 저택에 모여, 속임수를 써서 예수님을 붙잡아 죽이려고 공모하였다.”(마태 26,3-4)

 

카야파의 궁전 동쪽에 있는 피라미드형 지붕이 있는 구조물은 다윗 왕의 무덤이다. 무덤 모양은 예루살렘에서 발견된 동시대의 무덤인 키드론 계곡의 즈카리야 무덤과 오늘날 Rehavia 지역에 있는 제이슨의 무덤을 본떠 만들었다.

요세푸스는 헤로데가 국내외에 많은 도시들을 건설하다 보니 재정적인 어려움에 봉착하였고, 그래서 다윗의 무덤에 들어가 무덤의 보석을 약탈한 사건을 전한다. 그런데 이때 무덤에서 불이 나와 경호 병사들을 불에 타 숨지자 헤로데는 거액을 들여 흰 돌로 무덤 입구에 위령비를 세웠다.

시온산에 있는 다윗의 무덤은 장소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성경에서는 다윗은 자기 조상들과 함께 잠들어 다윗성에 묻혔다”(1열왕 2,10). 그리고 느헤미야는 다윗의 묘지 앞과 인공 못을 손질하였다’(느헤 3,16)고 전한다. 성경에서 언급하고 있는 다윗성은 다윗이 점령한 여부스족의 성읍이었던 다윗의 도시이다.

그리고 랍비 아키바는 도시 내부에 있는 다윗왕과 예언자 훌다의 무덤에서 키드론 계곡으로 연결되는 오물 터널을 이야기하는데, 이것은 무덤이 키드론 골짜기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요세푸스는 시온 산성’(2사무 5,7)을 이야기하면서 다윗 왕은 이 산을 요새라고 불렀는데 지금은 상부 광장이라고 전한다. 그렇다면 서기 1세기에는 다윗 왕의 무덤이 서민들이 사는 아랫도시에서 귀족들의 거주지인 윗도시로 이전했음을 알려주는 대목일 것이다.

성지의 프란치스칸들이 제일 먼저 시온산 위에 최후의 만찬 기념 수도원을 지으면서(1335) ‘다윗의 무덤 경당을 만들었다. 그 근거로는 베드로 사도가 성령강림 후 오순절 설교를 하면서 형제 여러분, 나는 다윗 조상에 관하여 여러분에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죽어 묻혔고 그의 무덤은 오늘날까지 우리 가운데에 남아 있습니다”(사도 2,29)는 사도행전의 말씀을 근거로 했을 것이다.

오스만 튀르크 제국이 들어서면서 이들은 다윗의 무덤을 빼앗기 위해서 최후의 만찬 수도원에서 프란치스칸들을 추방(1551)하였고, 이스라엘이 1948년 독립하면서 다시 유대인들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스라엘은 1948년 건국했음에도 불구하고 구시가지 예루살렘은 요르단의 통치하에 있었고(19676일 전쟁 때까지), 이 시기에 시온산의 다윗 무덤은 유일하게 유대인들이 방문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시온산의 다윗 무덤은 확실한 전승의 장소로 여겨지게 되었다. 이것은 시온산에 다윗 무덤을 배치하기로 한 모델 설계자의 결정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성전 산을 마주 보고 있는 가장 눈에 띄는 하스모니안 궁전은 기원전 2세기 후반에서 1세기 초까지, 요세푸스 플라비우스가 첫 번째 성벽(First Wall)이라고 언급하는 요새화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하스모니안 왕궁의 모형은 원뿔형의 두 개의 지붕이 있는 망루 모습으로 알아볼 수 있는데 성전의 서쪽벽 쪽에 위치 한다. 이 망루는 페트라의 무덤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요세푸스는 아그리파 2(Agrippa II, 서기 27-92)가 예루살렘이 멸망하기 몇 년 전에 예루살렘에 있는 하스모니안 궁전을 복원하고 확장했다고 말한다.

궁전의 위치와 높이는 도시 전체를 한눈에 볼 수 있게 해주었다. 요세푸스는 아그리파가 자신의 궁전에서 빈둥거리며 성전 경내에서 벌어지는 일들, 특히 희생제물을 바치는 모습을 내려다보는 것을 즐겼다. 종교 지도자들은 이러한 왕의 모습에 분노하여 왕의 시야를 차단하기 위해 성전 안뜰에 서쪽을 향해 높은 성벽을 쌓았다고 한다. 이 벽은 왕궁의 대식당의 전망을 가로막았고, 또한 성전을 감시하는 로마 병사들의 시야를 가렸기 때문에 아그리파 왕과 로마 총독 페스투스는 사제들에게 성벽을 허물라고 지시했고, 이에 불복한 유다의 유력 인사들은 네로 황제에게 호소하게 된다. 그러나 로마의 네로 황제는 사제들의 호소를 들어주었다하스모니안 왕궁은 제1차 유대항쟁이 시작되면서 유대인 반군들에 의해 불태워졌다.

 

모델에서 위쪽 도시의 동쪽에 있는 극장은 헬레니즘 로마 문명권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공공건물이었다. 그러므로 헤로데는 예루살렘에서 가장 화려한 건물로 만들었다. 요세푸스는 나중에 원형 경기장도 지어 황제를 기리기 위해 5년마다 경기를 열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이들 건물은 웅장하기는 했지만, 유대인들의 생활양식에는 맞지 않는 건물들이었다.

 

오늘날 통곡의 벽(서쪽벽)을 보기 위해 지나다 보면 성전산의 남서쪽 모퉁이 벽에 돌출되어 나와 있는 부분을 볼 수 있다. 이 돌출된 모양은 성전산 남쪽의 바실리카로 연결되는 아치가 있었던 것이라는 것을 발견한 이의 이름을 따서 로빈슨 아치라고 부른다.

요세푸스는 성전산의 이 기념비적인 계단을 언급하는데, 저명한 손님들이 바실리카에 드나들 때 그들의 사생활을 보호하기 위하여 이 기념비적인 계단을 만들었다고 한다.

 

통곡의 벽(Western Wall)과 통합된 가장 동쪽의 아치는 예루살렘(1867)을 탐험하기 시작한 최초의 영국 탐험가 중 한 명인 찰스 윌슨(Charles Wilson)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이것은 폭과 길이가 모두 13m에 달하는 매우 큰 아치이다. 이 아치 위의 다리는 윗도시에서 성전산의 성전으로 드나드는 문으로 사제들과 성전에서 종사하는 이들이 사용했다.

모델에서 윌슨 아치는 윗도시와 성전산 사이의 작은 계곡위로 놓여 있는데 아치의 아래쪽으로는 베들레헴 남쪽 솔로몬의 연못에서 성전산으로 물을 공급하는 수로가 다리를 지탱하는 동일한 아치를 통과했다.

북서쪽 모서리, 즉 제3차 성벽에 위치한 망루이다. 헤로데 아그리빠(Herod Agrippa I, 41-44 AD)가 요새화 하였다. 요세푸스 플라비우스의 유대 전쟁사에 따르면 팔각형 모양의 약 35미터의 높이로 일출때는 멀리 아라비아와 히브리인들의 땅 끝인 바다까지 보인다고 자랑한다.  

성전 모델의 서북쪽 전망대에서 바라볼 때, 2차 성벽이 급하게 꺾이는 곳 외부에는 예전에 채석장으로 쓰이던 곳인데 바위가 톡 튀어나온 곳이 있다. 사진에서 성문 밖 공터에 바위들이 있는 곳이다. 이곳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묻히시고 부활하신 골고타이다. 2차 성벽의 성문 밖에는 제1차 성전 시대 때부터 사용하던 품질 좋은 석회암 채석장으로 사용되던 곳이다. 채석장의 중심에는 돌출된 바위가 있는데 이것의 모양이 인간의 두개골과 비슷하다고 하여 해골 터라는 의미의 골고타라고 불렀다(마태 27,33 참조).

복음서에 따르면 이곳은 아리마태아 출신의 요셉이 바위를 깎아 만든 새 무덤에 예수님을 모신 곳이다(마태 27,57-60; 마르 15,42-47; 루카 23,50-56; 요한 19,38-42). 그리고 예수님은 이곳에서 부활하셨다(마태 28,1-8; 마르 16,1-8; 루카 24,1-12; 요한 20,1-10). 예수님의 매장 이야기와 유대 종교법의 요구 사항은 모두 무덤은 2차 성벽 밖에 있었다는 것을 증언한다.

 

다윗도성 왼쪽, 3차 성벽 안에는 정사각형 모양의 뽀족한 지붕 구조물이 눈에 띈다. 이것은 기원전 2세기에 하스모니안 왕이자 대사제였던 요한 히르카누스(John Hyrcanus, 135-104 BC 재임)의 무덤이다. 히르카누스는 성전 북서쪽에 안토니아 요새의 전신인 바리스라는 요새를 건설했고, 정복 사업을 벌여 요르단 동쪽 지역과 남쪽의 이두매아 그리고 사마리아까지 땅을 넓혀 가장 넓은 영토를 확장한 인물이다. 기원전 108년 그리짐 산 위에 세워진 사마리아 신전을 파괴하기도 하였다이 묘지는 동시대인 제2차 성전 시기에 만들어진 키드론 계곡에 있는 묘지의 형태를 따라 만들었다.

 

 

35. 망루 연못(Towers' Pool)

망루 연못(Towers Pool)은 헤로데 궁전에 일년 내내 흐르는 물을 공급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모델에서 히피쿠스 망루의 바로 북쪽에 위치해 있는데 근처 요새의 세 망루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오늘날 이것은 자파 게이트 바로 안쪽에 있는 히즈키야 연못이라고도 부르는 연못이다. 베들레헴 남쪽에 있는 솔로몬 연못에서부터 보내어진 물들이 이곳 윗도시 망루 연못에 저장되었다.

아래쪽은 베들레헴의 솔로몬 연못에서 예루살렘 망루연못으로 보내지는 수도관 연결 부위이다. 확실한 공사의 책임을 묻기 위해 연결부위 위쪽에는 공사를 책임진 부대의 책임자 이름이 새겨져 있다.

36. 성채와 타워 : 파사엘, 힙피쿠스 그리고 미리암메(The Citadel and Towers : Phasael, Hippicus and Mariamme)

헤로데는 해발 777미터의 높이에 3개의 망루를 갖춘 성채를 건설하였다. 이 전략적 요충지에는 이미 제1차 성전 시대와 하스모니안 왕조 시대에 요새화되었는데, 바로 남쪽에 헤로데의 궁전이 들어서자 그 중요성은 더 강화되었다. 이곳은 오늘날 자파 게이트와 일치하는 서쪽의 장소인데, 3개의 성벽이 만나는 지점으로서 그 중요성이 특별한 곳이기도 했다.

헤로데는 자신과 특별히 가까운 사람들에게 자신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기 위해 새로운 신도시와 건축물들에 이름을 부여했는데 헤로데 궁전 북서쪽에는 궁전을 방어하고 유사시에 피신하기 위한 망루 세 개에도 그가 가장 사랑했던 이들의 이름을 부여했다.

친구의 이름을 딴 힙피쿠스 망대(Hippicus Tower)

파사엘 뒤의 세 성벽이 만나는 곳에 있는 망루는 헤로데의 친구이자 전투에서 쓰러진 로마 기병대 사령관의 이름을 딴 힙피쿠스 망루이다. 발굴된 암석 기반은 12.5m로 측정되었으며 2개의 층과 그 위에 탑이 솟아 있어 총 높이가 40m이다. 그 아래에는 약 10미터 깊이의 바위를 깎아 만든 물 저장소가 있다.

자기 형제의 이름을 딴 파사엘 망대(Phasael Tower)

성문에 가장 가깝고 높은 서쪽 망루는 헤로데의 친형제인 파사엘의 이름을 따서 세 망대 중 가장 화려한 거실과 욕조까지 왕궁에 갖춰야 할 모든 것을 갖춘 망대였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성벽과 같은 강도로 튼튼하게 구축되었는데 이것은 오늘날 다윗 성채라고 부르는 자파 게이트쪽의 요새이다. 그 크기는 21.4 x 17 x 20미터이다. 포탑과 흉벽으로 장식된 탑은 45m 높이였고 그 디자인은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알렉산드리아의 유명한 파로스 등대와 닮았다고 요세푸스는 전한다.

가장 사랑하던 부인의 이름을 딴 마리암메 망대(Mariamme Tower)

세 번째 망루는 헤로데의 질투 때문에 살해한 사랑하는 하스모니아 왕비의 이름을 딴 마리암메 망루이다. 이것은 세 망루 중 가장 작고 낮았지만 다른 두 개의 망루보다 더욱 화려하고 아름답게 장식하였다. 헤로데는 자기 아내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은 남자들의 이름을 딴 것보다 더 치장해야 하고, 남자들의 이름을 딴 망대들은 자기 아내에게 헌정한 것보다 더 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서기 70년에 이 도시를 정복하고 파괴한 로마의 총사령관 티투스는 이 세 개의 강력한 탑을 자신이 강제로 복종시킨 증거로 삼고자 남겨 두었기에 오늘날은 다윗 성채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38. 서쪽벽(The Western Wall)

두개의 원뿔형의 지붕이 있는 망루는 하스모니안 왕궁이며 두 망루 뒤쪽으로해서 보이는 것은 사제들이 성전산으로 드나들수 있도록 만든 윌슨 아치이다. 윌슨 아치의 오른쪽 성벽이 오늘날 통곡의 벽이라고 부르는 서쪽벽이다. 이 성벽은 헤로데에 의해 확장된 성전의 벽이었다.

11. 알렉산더 얀네우스의 무덤

벳자타 연못의 북쪽에는 하스모니안 왕 알렉산더 얀네우스(Alexander Jannaeus, 기원전 103-76 재임)의 무덤이 있다.

 
 

정녕 주님께서는 시온을 선택하시고 당신 처소로 원하셨네.

이는 길이길이 내 안식처 내가 이를 원하였으니 나 여기에서 지내리라.

(시편 132,13-14)

 

예루살렘아, 주님을 기려라. 시온아, 네 하느님을 찬양하여라.

(시편 147,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