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

성경의 전당(책의 전당)-The Shrine of the Book

테오필로 2023. 8. 27. 16:26

성경의 전당(The Shrine of the Book)1948514, 새롭게 독립 국가를 형성한 이스라엘에 마치 제3차 성전과도 같은 민족의 자긍심이자 희망을 안겨주는 대표적인 건물이 되었다.

유대 민족이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게 된 것은 기원전 63, 로마의 폼페이우스에게 점령되면서(정치적)이지만 유대 민족의 멸망(신앙적)은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는 서기 70년이 될 것이다. (비록 제2차 유대 항쟁이 서기 132~135년에 있게 되지만).

역사가 증명하듯이 나라가 망하면 민족이 사라지는 것이 당연한 이치인데 역사상 유일하게 망한 민족이 다시 나라를 건국한 것은 유대인들이 유일하다. 성전이 파괴되고 나라가 망한 후 온 세상에 흩어져 2천 년을 떠돌아다녔지만, 그 망한 민족을 다시 일으키게 한 원동력이 있다면 그것은 책의 민족”(성경의 민족)이라고 불렸던 바로 성경이다.

기원전 586년 바빌로니아에게 제1차 성전이 파괴되고 유배되면서 일상 언어에서 사라지기 시작한 히브리어가 현대 히브리어로 재탄생할 수 있게 된 것도 성경의 덕분이며 유대인 하면 관용어처럼 따라오는 머리 좋고 돈 많은민족이 될 수 있었던 것도 모든 지혜의 뿌리이자 창조의 원천인 바로 그 성경덕분이다.

책의 민족인 유대인들에게 성경은 주권이 없고 성전이 없이 떠돌아다니는 방랑 민족일지라도 그들을 지켜주는 방패요 등대이며 신앙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어느 날 갑자기 땅속에 2천 년이 훨씬 넘는 성경이, 성전이 파괴되기 이전에 한 종파가 성전처럼 여겨오던 성경이 빛을 받은 것이다.

이게 우연일까? 아니다.  우연’에 정성을 담으면 ‘운명’이 된다.. 그러면 그건 신의 섭리이다.

사해사본이 1947년 세상에 알려지고 히브리 대학교의 수케닉(Eleazar Lipa Sukenik, 1889.8.12-1953.2.28)과 그의 아들 이갈 야딘(Yigael Yadin, 1917.3.20-1984.6.28)에 의하여 쿰란 제1 동굴에서 발견된 7개의 성경 두루마리가 모두 예루살렘에 있음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552월이었다. 그러자 이스라엘 정부는 고대 두루마리들을 보존하고 전시하기 위한 기밧 람(Givat Ram)에 있는 히브리대 캠퍼스의 국립도서관 옆에 특별 홀을 지을 것을 결정하였다.

1957년 미국의 저명한 유대인 건축가 키슬러(Frederick J. Kiesler, 1890-1965)와 바르토스(Armand P. Bartos, 1910-2005)가 그 목적을 위해 선정되었다.

 

이들은 처음부터 고대 사본들과 유물들을 보관하고 전시하는 박물관의 기능을 하는 건물을 만들려고 하지 않았다. ‘성경의 전당’(The Shrine of the Book, (히브리어: היכל הספר, Heikhal HaSefer)이라는 이름은 1950년대에 교육부 장관인 디누르(Benzion Dinur) 교수가 제안했다. '신전' 또는 '성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단어인 헤이칼(היכל, Heikhal)이라는 단어를 사용한것은 이스라엘 국가 초기에 "3의 성전"을 염두에 둔 성스럽고 영적인 건물이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2년간의 히브리대학 캠퍼스 내의 설계는 거부되었고 대안으로 제시된 곳은 이스라엘 국립박물관이 들어설 언덕이 제안되었다. 또다시 우연인지 성경의 전당이 일반에게 공개된 1년 후, Holy Land Hotel에 있던 2차 성전 시기의 예루살렘 모형66일간의 이전 공사를 통해 성경의 전당서편에 자리잡았다. 성경의 전당은 이스라엘 국가의 국회의사당인 크네세트(Knesset)와 주요 정부 청사와 대법원, 이스라엘 은행과 히브리대학과 같은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국가 기관들 옆에서 그들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중심 건물이 되었다.

건축가 키슬러와 바르토스침묵의 성소’(A Sanctuary of Silence)와 같은 영적 경험을 제공해 주는 사원과 같은 특성이 있는 구조물을 만들고자 했다. 이를 위해 건축가는 재료들, 빛과 어둠, 외부 공간과 내부 공간 사이의 흐름, 다양한 기하학적 형태, 진열되는 유물들의 특성 등 다양한 수단을 고려했다.

한 순례자가 예루살렘의 성전을 순례하기 위해 몸과 마음을 깨끗이 씻는 정결례를 하고 이방인들의 뜰을 거쳐 이스라엘 뜰을 통해 성소로 나아가듯, 광야의 소용돌이에서 영원한 하느님의 집을 찾아 명상의 동굴로 나아가듯, 그리고 대사제가 성소들을 거쳐 가장 깊은 안쪽에 있는 지성소로 나아가는 순례하는 하느님 백성의 길 모양으로 구조로 설계했다. 그러므로 박물관 정문을 들어서 성경의 전당으로 향하면 철골구조의 죽은 올리브 나무와 부서진 석관들, 중앙 광장에 놓여 있는 흑백의 건물들, 계단을 통해 마치 심연의 동굴 속으로 나아가는 길은 하나의 신앙 체험 여정을 느끼게 한다.

 

 

박물관 정문으로 들어서 성경의 전당쪽으로 향하다 보면 오른쪽으로 중국 베이징 출신의 건축가 겸 예술가인 아이 웨이웨이(1957년생)의 철 주조물로 만든 철 올리브 나무’(2016)가 있다. 뜨거운 햇볕에 붉게 물들어 말라 죽어 축 늘어진 것처럼 보인다. 운명에 순응하는 이들의 죽은 그림자이다.

Ai Weiwei, Iron Tree, 2016

 

그리고 성경의 전당과' '2차 성전 시기의 예루살렘 모델' 사이에는 여러 석관이 놓여 있다. 죽음 바로 그것이다. 그 죽음마져 파괴되어 있다. 이것이 광야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40년간 유랑했듯, 엣세네파 회원들은 화려한 예루살렘을 버리고 사해 북서쪽의 광야에서 하느님을 만났다.

이사 40,3 한 소리가 외친다. “너희는 광야에 주님의 길을 닦아라. 우리 하느님을 위하여 사막에 길을 곧게 내어라.

 

우선, 건축가들의 의도적인 설계가 아닌 우연에 기인한 것이지만 '성경의 전당'과 '제2차 성전 시기의 예루살렘 모델'은 그 자체적으로 대조를 이룬다. 엣세네파 회원들이 예루살렘을 떠나 유대 광야로 나아간 것은 대사제직의 매관매직과 같은 성전 예식의 부당함과 그리스-로마화로 세속화된 예루살렘에 혐오감을 느꼈고, 예루살렘 그 자체가 죽음의 세력이라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성경의 전당과 예루살렘 모델이 함께 있는 모습은 예루살렘이 싫어 광야로 떠나간 이들의 측면에서 보면 아이러니할 수밖에 없다. 이들은 철저한 예정론을 믿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스라엘의 건국은 '무덤의 뼈에 새 영'을 불어 넣어 살려내신 신의 섭리였을까?

에제 37,13 (이스라엘의 부활 환시) 내 백성아, 내가 이렇게 너희 무덤을 열고, 그 무덤에서 너희를 끌어 올리면, 그제야 너희는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14 내가 너희 안에 내 영을 넣어 주어 너희를 살린 다음, 너희 땅으로 데려다 놓겠다. 그제야 너희는, 나 주님은 말하고 그대로 실천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주님의 말이다.

 

중앙 광장에 있는 흰색 돔과 마주 보는 검은색 현무암 벽은 색상, 모양, 의미에서 서로 균형을 이루고 있다.

오른쪽의 흰색 돔은 쿰란 제1동굴에서 최초의 사해 두루마리 3개가 발견된 항아리의 뚜껑 모양으로 만들었다. 자연스럽게 그 아래쪽 땅속은 성경 두루마리들을 간직하고 있는 쿰란 제1동굴이 된다. 또한 흰색 돔은 신생 이스라엘 국가의 재건과 유대 민족이 부활을 상징하고 검은 벽은 수 세기 동안 성전과 나라 없이 떠돌아다녀야만 했던 디아스포라에서의 고통을 나타낸다.

흰색 돔과 반대편의 검은 현무암 벽은 쿰란에서 신앙 공동체를 이루며 살았던 엣세네파의 믿음을 표현했다. 흰색 돔은 빛의 아들들인 엣세네파의 회원들을 상징하고 검은색 벽은 예루살렘에 있는 그들의 적들인 어둠의 자식들이다. 이것은 엣세네파 회원들이 가졌던 이원론적인 세계관을 반영하며 세상과 영적 세계의 긴장을 암시한다.

돔에 뿌려지는 물은 엣세네파들이 가장 중요시했던 정결 예식이며 밤에 돔을 비추는 조명등이 있는 네 모서리의 뿔은 하느님의 힘과 현존을 상징하는 성전 제단의 뿔이다.

탈출 27,2 (제단) 그 네 귀퉁이에는 뿔을 만드는데, 뿔과 제단을 한 덩어리가 되게 하여 청동을 입혀라.

제단, 브에르 세바, 기원전 8세기, 사암, 이스라엘 박물관

돔 왼쪽은 둥근 달
둥근 돔 위로 떠 있는 둥근 달. '쿰란' 이라는 지명의 어원을 상기시킨다.

오늘날 쿰란(Qumran)이라는 이름은 ‘달’을 의미하는 아랍어 Qamar에서 유래하는데 제2차 성전시기의 지명은 ‘스카카’. 공동번역은 '스가가')였다.

여호 15,61 (유다 지파의 성읍들) 광야에 있는 성읍들은 벳 아라바, 미딘, 스카카,

 

건축가는 현무암 벽 위에 영구적인 횃불을 설치하여 돔에서 뿌려지는 물줄기와 대조적인 균형을 이루려 했는데 기술적인 이유로 포기했다고 한다.

 

땅속에 감추어진 보물인 지하 동굴로 들어가는 방법은 검은 대리석의 오른쪽으로 들어서면 계단을 통해 지하로 내려가는 방법과 제2차 성전 시대의 예루살렘 모델 쪽에서 들어가는 방법이 있다.

검은 대리석 옆으로 계단을 통해 내려가면 마치 엣세네파 회원들이 정결례 욕조로 들어가는 모습을 상기시킨다. 내려감은 인간을 살리는 것(겸손)이고, 올라감은 신의 속성이다.

 

예루살렘 모델 쪽 극장을 통해 들어가면 유다 광야의 모습이 찍힌 사진들을 보면서 들어가게 된다. 이것은 관람자가 이미 광야의 동굴에 들어선 느낌을 준다.

맞은편엔 유대 광야의 사진이 걸려 있다.

 


입구-이스라엘의 뜰

입구 쪽을 향해 바라보면 위쪽으로는 검은 현무암 벽이 서 있고, 아래쪽으로는 정 중앙에 입구가 있는데 이것은 고대 사원이나 무덤의 입구를 형상화했다. 둥근 돌로 막는 무덤의 입구처럼 좁은 입구로 만들었다.

 

 

1차 성전이 이스라엘의 뜰, 사제들의 뜰과 지성소 세 공간으로 나뉘어 있듯이 성경의 전당도 세 공간으로 나뉘어 있다. 먼저 입구를 들어서 첫 번째 공간은 아직 성소에 들어가기 전인 현관과 같은 공간이다. 이곳은 사해 사본이 발견되고 11개의 동굴에서 사본들이 발굴되는 과정들, 그리고 이갈 야딘에 의해 다시 첫 번째 동굴에서 발견된 두루마리들이 모여지는 과정들을 설명한다. 이곳은 영적 여정을 떠날 준비를 하는 휴게실과 같은 역할을 하는 곳이다.

 

사해 사본 발굴 역사를 간략하게 살펴 보면...

1947. 1

타아미레(Ta'amireh) 출신의 베두인들이 잃어버린 염소를 찾기 위해 던진 돌이 2천년의 침묵을 깨트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쿰란 근처의 동굴에는 10개의 항아리가 숨겨져 있었는데 그중 한 항아리에 온전한 이사야서 사본 1(1QIsaiah a)과 공동체 규칙서(Rule of Community) 그리고 하바쿡 주석서(Pesher Habakkuk)가 들어 있었다.

베두인과 그들이 발견한 쿰란 제1 동굴의 항아리들
쿰람 제1동굴 앞에서, 벨기에와 요르단 병사

 

19473-4

다시 동굴을 찾아가 땅 속에 묻힌 두 번째 이사야서 사본(1QIsaiah b), 전쟁 사본(War Scroll), 감사 찬송(Hodayot) 그리고 창세기 외경(Genesis Apocryphon)을 추가로 찾아냈다.

칸도(Kando)라고 알려진 베들레헴의 시리아 정교회 신자인 구두 수선공인 칼릴 에스칸더(Khalil Eskander)4개의 사본들을 샀다. 그리고 두 번째 이사야서 두루마리(1QIsaiah b), 전쟁 두루마리(War Scroll), 감사 찬송(Hodayot)은 베들레헴의 다른 골동품 상인 파이디 샬라히(Faidi Salahi)가 샀다.

골동품 상인이자 구두 수선공인 칸도

 

19477

예루살렘의 시리아 정교회의 주교 아타나시우스 사무엘( Athanasius Samuel)은 칸도로부터 4개의 두루마리를 97.20$에 샀다. 이것은 온전한 이사야서 사본 1(1QIsaiah a), 공동체 규칙서(Rule of Community), 하바쿡 주석서(Pesher Habakkuk) 그리고 창세기 외경(Genesis Apocryphon)이었다.

예루살렘의 시리아 정교회의 주교 아타나시우스 사무엘, 사무엘과 그의 어머니는 오토만 튀르크의 1916년 대학살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로 망명자처럼 떠돌다가 마침내 예루살렘에 도달한 것이었다. 이곳에서 사무엘은 사제로 양성되었고, 수도원 사서로 일하다가 대주교로 서임되었다. 아타나시우스는 미국과 카나다의 보좌주교가 되었고 네델란드의 Glane 대성당에 묻혔다.

 

19471129일 토요일(안식일)

히브리 대학교(영국의 위임 통치 기간인 1925년 개교)의 수케닉 교수는 정치적 상황이 최고로 불안정했음에도 불구하고 베들레헴에 몰래 들어가 감사찬송과 전쟁 사본을 샀다. 이날은 유엔 총회에서 팔레스타인 지역을 유대인과 아랍인을 위해 2개의 국가로 나눌 것을 결정한 날이었다. 수케닉 교수는 이날 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이것은 이 나라에서 밝혀진 위대한 발견 중 하나일 것입니다."

수케닉은 추가 자금을 모아서 다음 달 12월에 두 번째 이사야서 두루마리와 항아리 두 개도 샀다.

감사찬송과 전쟁 사본을 산 날, 수케닉 교수의 일기
감사 찬송 두루마리를 살펴보고 있는 수케닉 교수
사해 사본을 보관하고 있던 항아리, 쿰란 제1동굴

 

19482

아타나시우스 주교는 오늘날 록펠러 박물관의 전신인 미국 동양학 연구소(American Schools of Oriental Research)에 넷 중 상태가 양호한 3개의 사본에 대한 고증을 위탁하였다.

이에 사본의 진가를 깨달은 연구소의 성경학자이자 예일대(Yale University) 대학의 전문 사진사였던 존 트레버(John Trever)는 전운이 감돌던 시기였기 때문에 연구소의 지하에서 첫 번째로 온전한 이사야서 사본 1, 공동체 규칙서 그리고 하바쿡 주석서를 사진으로 찍었다. 이 사진은 성경 고고학의 최고의 권위자였던 미국 존스 홉킨스 대학교의 윌리엄 폭수웰 올브라이트(William Foxwell Albright, 1891-1971, 칠레 태생의 미국의 고고학자이자 성경학자, 문헌학자. 성서 고고학 분야에 큰 공헌)가 읽을 수 있게 했고, 그는 사본들의 연대와 확실성을 확증하였다.

이후 아타나시우스 주교의 허락으로 온전한 이사야서 1, 공동체 규칙서, 하바쿡 주석서가 출판되었다.

존 C. 트레버

 

19492

이스라엘 독립전쟁 중 시리아 정교회 대주교 아타나시우스는 그가 사들인 두루마리들을 레바논 베이루트로 가져갔고, 그곳에서 다시 미국으로 반출하였다. 그는 미국의 뉴저지(New Jersey)에서 연구를 계속하기 위해 트레버를 만났다.

 

194910-195111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의 듀크 대학, 워싱턴 국회의사당 도서관, 더 월터스 아트 뮤지엄, 볼티모어, 시카고, 매사추세츠 등 여러곳에서 사본들을 전시했다.

 

195111-19563

첫 번째 동굴이 발견된 5년 후 다시 베두인들에 의해 1952233개의 사본 조각이 있는 두 번째 동굴 발굴이 되고, 이로써 고고학자들과 베두인들 간의 두루마리 찾기 경쟁이 본격화되었다. 베두인들은 모두 다섯 개의 동굴을 찾아냈는데 제1동굴(1947), 2동굴(1952), 4동굴(1952), 6동굴(1952), 11동굴(1956)이다. 이당시는 예루살렘과 그 동편인 사해쪽은 요르단 왕국의 관할이었기에 신생 이스라엘 국가의 개입이 용인되지 않았던 시기였다. 

베두인들과의 상대였던 예루살렘의 프랑스의 도미니칸 성서 대학인 에콜 비브릭(École Biblique)의 책임자 롤란드 드 보 (Roland De Vaux , 1903.12.17-1971.9.10)가 이끄는 고고학자들은 제3동굴(1952), 5동굴(1952), 7동굴(1955), 8동굴(1955),, 9동굴(1955), 10동굴(1955), 6개의 동굴을 찾아냈다.

 

195210-1960년 후반

두루마리 사본 출판을 준비하기 위해 8명의 학자로 구성된 국제 팀이 구성되었다. 이 연구는 예루살렘의 록펠러 박물관에서 수행하였다.

 

19546

시리아 정교회의 아타나시우스 주교는 6년 동안 사해 사본을 판매하고자 했으나 실패하자 소유의 두루마리가 뉴욕에서 판매하기 위해 "월 스트리트 신문사"(Wall Street Journal)에 광고하였다.

광고 내용은 네 개의 사해 두루마리. 적어도 기원전 2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성경 사본이 판매됩니다. 이것은 개인이나 그룹이 교육 기관이나 종교 기관에 이상적인 선물이 될 것입니다.”

4개의 두루마리는 100만 달러에 팔고자 하였으니 수케닉 교수(1953년 사망)의 아들 이가엘 야딘 교수는 이스라엘 국가를 대신하여 25만 달러를 지불하고 두루마리를 샀고 비밀리에 이스라엘로 공수했다. 이갈 야딘은 아타나시우스 주교가 유대인에게 파는 것을 거부할까 봐 협상인으로 중개인을 내세웠고, 헝가리 태생의 상인이자 금융가, 자선가인 데이비드 사무엘 고테스만(David Samuel Gottesman, 1884.2.22-1956.4.21)의 도움을 받은 덕분이었다.

 

1955213

이갈 야딘은 쿰란 제1동굴에서 발견된 7개의 사본이 모두 이스라엘에 있음을 세상에 공표하였다. 그리고 교육과 과학을 증진하기 위한 책의 전당 재단 설립을 시작하였다.

 

1965년 4월 20일

성경의 전당은 이스라엘 박물관이 설립되기 1달 전, 봄에 개관하였다.

 


성소-순례의 여정

3개의 계단에 올라서면 본격적으로 성소로 이어지는 관문으로 두루마리를 말아놓은 형상의 청동관으로 만들어진 문을 통과하게 된다. 이 청동 대문의 바로 위 지상에는 검은 현무암 대리석이 서 있는 곳이다. 그러므로 어둠의 자식에서 빛의 자식으로, 육적인 인간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 영적으로 다시 태어남의 통과 여정으로 형상화 했다.

 

곡선과 각진 형태, 매끈한 광택과 거친 재료를 사용하여 대조의 상징성을 전달하는 건축 양식으로 표현된 다섯 개의 작은 공간들은 쿰란 유적지에서 발굴된 유물들을 전시하면서 이곳에 살았던 엣세네파의 삶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이 다섯 개의 공간은 영원한 안식처를 향해 나아가는 육적인 세계에서 영적 여정을 향해 나아감을 상징한다.

좁고 낮은 천장의 다섯 개의 공간은 유물을 보여주기 위한 희미한 빛으로 두루마리가 발견된 동굴을 연상시킨다. 욕망을 상징하는 높은 천장은 빛이 없는 어두움이고, 세상사의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유물들을 설명하는 곳만 빛이 비추이고 있다. 세상은 거칠지만 하느님을 향해서 한계단 한계단 내려가는 길들은 밝고 부드럽니다.

첫 번째 방을 들어서면 오른쪽엔 해시계가 있고 왼쪽엔 철기시대 양동이 형태의 철제 용기인 시툴라(situla)가 있다.

쿰란에 살았던 엣세네파 회원들은 예루살렘의 성전에서 따르는 태음역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들은 따로 태양력을 사용하면서 자기들만의 축제일들을 기념하였다.

해시계, 키르벳 쿰란, 기원전 1세기-서기 1세기, 석회암
시툴라(situla-철기시대 이태리 양동이형 철제 용기), 키르벳 쿰란, 기원전 1세기-서기 1세기, 청동-철

 

두 번째 방을 들어서면 오른쪽엔 '독신 또는 가족?'이라는 주제이고, 왼쪽엔  '광야에서의 생활'이라는 주제이다.

구슬, 키르벳 쿰란, 서기 4-5세기, 유리, 돌
빗, 키르벳 쿰란, 기원전 1세기-서기 1세기, 목제
'요세포스'(IOSEPOS)라는 이름이 새겨진 인장, 그리스어, 키르벳 쿰란, 기원전 1세기-서기 1세기, 석회암

 

샌들, 키르벳 쿰란, 기원전 1세기-서기 1세기, 가죽

두 번째 방 왼쪽은

기름 등잔, 키르벳 쿰란, 기원전 1세기-서기 1세기, 도자기
그릇, 키르벳 쿰란, 기원전 1세기-서기 1세기, 목제
샌들 못, 키르벳 쿰란의 길, 기원전 1세기-서기 1세기, 철
작은 망치, 키르벳 쿰란, 기원전 1세기-서기 1세기, 금속-목제
작은 그릇, 키르벳 쿰란, 기원전 1세기-서기 1세기, 도자기

 

세번째 공간은 오른쪽으로는 '농부들과 목동들' 그리고 왼쪽은 '공동 기도'와 관련된 것들을 전시한다.

양털깎는 가위, 키르벳 쿰란, 기원전 1세기-서기 1세기, 철과 동
두 날의 원형 낫, 키르벳 쿰란, 기원전 1세기-서기 1세기, 철

 

괭이, 키르벳 쿰란, 기원전 1세기-서기 1세기, 철
밧줄, 키르벳 쿰란, 기원전 1세기-서기 1세기, 대추야자나무 섬유질

세번째 공간 왼쪽에는

성구갑 상자(Phylactery_Tefillin), 쿰란 동굴 4, 서기 1세기, 가죽
성구갑을 열고 닫은 모습{윗쪽)과 성구갑에 들어가는 말씀 양피지를 감고 편 모습(아래쪽)

 

네 번째 방 오른쪽은 '정결례와 정화'와 왼쪽은 '공동경제'와 관련한 유물들이다.

용변 처리를 위한 곡괭이(?), 쿰란 11번 동굴, 기원전 1세기-서기 1세기
정결례를 위해 손을 씻기 위한 측량 물컵(?); 키르벳 쿰란, 기원전 1세기-서기 1세기, 석회암

네 번째 방 왼쪽은

도자기 그릇들, 키르벳 쿰란, 기원전 1세기-서기 1세기
중량 단위계, 키르벳 쿰란(엔 페스카, 기원전 1세기-서기 1세기, 석회암

 

비축 동전들, 키르벳 쿰란, 기원전 1세기, 은

 

다섯번째 공간 오른쪽은 '마음의 예배: 저녁과 안식일', 왼쪽은 '공동식사'이다

원형 심지가 있는 기름 등잔, 키르벳 쿰란, 기원전 1세기-서기 1세기, 도자기

 

왼쪽은 '공동 식사'는 '식사 및 주방 도구들이다.

불에 탄 대추야자, 키르벳 쿰란, 기원전 1세기-서기 1세기

 

다섯 개의 작은 공간은 유대인들에게 성경 중에서 가장 중요한 모세 오경의 다섯 두루마리를 표현하는 숫자를 형상화 한듯하다. 그리고  가장 낮은 여섯 번째 방의 좌우에는 첫 번째 동굴에서 두루마리를 보관하고 있었던 두 개의 항아리가 전시되고 있다. 이 곳은 이전의 다섯 공간과 다르게 좌우 두 벽면에 '하느님의 말씀을 담고 있었던 항아리'를 진열하면서 밝은 붉은 빛으로 '진리를 위해 살아온' 슈케닉 교수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벽에 새겼다.

이 여섯째 방은 마치 요한복음의 카나의 혼인잔치(요한 2,1-12)의 표징을 떠올리는 정결례를 위한 여섯 항아리처럼 빈 항아리로 놓여 있다. 그러나 '이미 그러나 아직 아니'(Hic et nunc)인 공간이다. 한계단 한계단 쉽게 내려갈 수 있었던 그런 삶이었다면 이제는 '빛'을 바라보며 올라가야 하는 계단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

 


지성소

두루마리 모양의 입구에서부터 다섯 개의 전시실은 한 계단씩 내려가는 구조였다면 두 항아리가 전시된 곳은 가장 낮은 곳이 된다. 가장 깊은 내면에 감추어진 보물처럼, 땅속에 묻힌 보물을 찾은 이는 이제부터 가장 중요한 성소 중의 성소인 지성소로 연결된 작은 문을 통해 올라가면 밝고 환한 돔의 중앙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사야서 두루마리, 기원전 120-100년, 양피지, 히브리어 사본, 7.34m, 쿰란 제1동굴발견

항아리 뚜껑 안쪽은 태고의 창조 때 흙을 어루만지시는 창조주의 손결이 느껴지고, 그 정중앙엔 쿰란 제1동굴에서 발견한 이사야서 66장 전권의 두루마리가 펼쳐져 있다. '고난받는 종'들에게 '새 하늘 새땅'에 대한 희망을 안겨 주었던 이사야서의 말씀은 떠돌아 다니는 '어둠의 백성'인 유대인들에겐 최고의 위안이었을 것이다. 그 희망이 2천년의 세월을 이겨냈다.

집회 33,13 옹기장이가 제 손에 있는 진흙을 제 마음대로 빚듯 인간은 자신을 만드신 분의 손안에 있고 그분께서는 당신 결정에 따라 인간에게 되갚으신다.

하느님의 말씀이 쓰여있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이사야서 양피지를 감고 있는 두루마리 손잡이는 생명의 나무라고 한다. 그리므로 양피지는 각 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생명의 나무에 붙어 있는 ’(leaf)이라고 표현한다. 이런 성경에 대한 경외심은 알레포 사본처럼 오래된 책으로 제본된 코덱스들도 마찬가지로 이라고 한다.

이사야서 두루마리. 두루마리로 만들기 위해 실로 꿰맨 자국을 볼 수 있다.

 

둥근 원형 성소에는 쿰란 제1동굴에서 발견된 원본들을 전시하고 있지만 중앙에 있는 이사야서 두루마리는 처음 얼마간 원본을 전시하다가 안전한 보존을 위해 사본을 전시하고 있다. 처음 설계에서 뚜껑의 꼭대기는 로마 판테온 신전처럼 하늘을 볼 수 있는 열린 구조였었다고 한다.

항아리 내의 원형 공간 중앙에는 온전한 이사야서 두루마리가(사본) 전시되어 있고, 나머지 여섯개의 두루마리들은 엣세네파 공동체를 설명하면서 원본을 진열하고 있다. 

 

 


 

 

이사야서가 전시되고 있는 두루마리의 아래쪽은 원형 계단을 통해 내려갈 수 있다. 아래 구조물은 마치 사과를 베어먹고 남은 모양인데 가공되지 않은 자연석 거친 돌들로 만들었다. 온전한 이사야서 66장을 보관하고 있는 위쪽 공간은 밝은 빛의 완전함을 의미한다면 이사야서 두루마리의 아래쪽 지하 공간은 선의 결핍인 불완전한 세상처럼 인간들의 손을 탄 사과 형상이다. 마치 알레포 사본처럼 온전히 보존되지 못했던 현실처럼.

 

이사야서 두루마리 사본 아래에는  두루마리(Scroll) 형태의 초기 말씀에서 오늘날의 성경 형태로 발전되어 가는 천년의 발달 과정을 보여주는 알레포 사본(The Aleppo Codex)이 전시되고 있는 곳이다. 두루마리는 오늘날도 유대인 회당에서 전례를 위해 사용되는 말씀이다두루마리 사본은 모세 오경은 다섯 개의 두루마리가 있어야 하는 것이지만 알레포 사본처럼 코덱스화 된 성경은 히브리 성서 24권이 단 한 권으로 묶였음을 의미한다.

 


 

알레포 사본(The Aleppo Codex)는 기원후 10세기 갈릴래아 호숫가의 티베리아에서 필사된 성경 사본이다. 성전 파괴 후 떠돌던 산헤드린이 마지막으로 정착한 곳이 티베리아였다.

일반 히브리어 성경은 자음만으로 쓰였기 때문에 일반인들을 읽을 수 없게 되자 발음, 철자, 구두점, 그리고 여러 세대에 걸쳐 전해 내려온 음가의 전통을 표시하는 마소라 사본이 서기 5세기 말부터 적용되기 시작하고, 10세기에 들어서 티베리아에서 표준화되었다. 그 마소라 사본 중 알레포 사본이 현존하는 가장 온전한 사본이다.

여호수아 1,1

알레포 코덱스를 의뢰한 사람의 신원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완성된 지 수년이 지난 후 이라크 바스라의 부유한 카라임파인 이스라엘 심하(Simhah)가 그것을 사들여 예루살렘 카라임파 회당에 봉헌 했다고 한다. 카라임파는 히브리어 성경을 유대 종교법과 관습의 유일한 원천으로 간주하고 전승을 기록한 탈무드의 권위를 부인하는 유대교 종파이다. 이 종파는 기원후 8세기 바빌로니아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 회원들은 9세기 후반에 이스라엘로 이주하기 시작했고 10세기와 11세기에는 예루살렘을 종교 중심지로 삼았다.

그 후 1071년에 이집트로 밀수되어 셀주크(터키계 침략자)에 의해 그곳에서 팔렸거나, 1099년 십자군에 의해 그곳으로 옮겨졌다. 이집트에서 알레포 사본은 옛 카이로에 있는 예루살렘 유대인 회당에 맡겨졌다.

이때 위대한 철학자이자 법률(할라크) 권위자인 마이모니데스(1138-1204)는 자신의 법률 코드인 미슈네 토라에서 토라 두루마리와 관련된 법률을 공식화할 때 알레포 사본에 의존하였고, 알레포 사본에 대한 마이모니데스의 평가는 사본의 권위로 자리매김 하였다.

마이모니데스(1135-1204)

마이모니데스가 극찬한 알레포 사본은 가장 정확하게 필사된 사본으로서 히브리 성경 24권 모두를 포함하고 있는 가장 권위가 있는 표준 텍스트로 사용되었다.

14세기 말, 아마도 1375년에 알레포 사본은 예슈아(David bar Yehoshua)라는 마이모니데스의 후손에 의해 이집트에서 시리아의 알레포(히브리어로 Aram Tzova로 알려짐)로 전해졌다. 이 알레포의 명칭이 사본의 이름으로 정착된 것이다. 고대 회당에 있는 엘리야의 동굴에 보관된 사본은 대중이 볼 수 없게 이중 자물쇠로 봉인된 금속 상자에 보관되었다. 알레포의 유대인들은 사본을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사본으로 여겼고, 알레포 사본의 명성은 온 세계로 전해지게 되었다. 사람들은 이 책을 너무나 신성하게 여겼기 때문에 종교 재판관들 앞에서 맹세하는 데 이 책을 사용했으며, 그 책에 마법의 속성이 있다고 믿었다.

알레포 회당

알레포 사본의 영광스러운 역사는 유엔 총회가 팔레스타인을 분할하고 유대 국가를 수립하는 결의안을 채택하는 날 끝나게 되었다. 1947121, 아랍 세계 전역에서 유대인과 유대교 회당에 대한 폭동이 일어났고, 알레포의 유대교 회당도 불태워졌다.

저명한 히브리대의 움베르토 카수토 교수는 194812일 자 하아레츠 일간지에서 다음과 같이 기고하였다. "언론에 게재된 뉴스가 정말로 사실이라면 알레포 유대인 공동체의 자랑이었던 유명한 히브리어 성경, 전통에 따르면 마이모니데스가 사용했던 케테르 아람 초바(Keter Aram Tzova)라고 불리는 알레포 사본은 알레포의 유대인들을 상대로 발생한 폭동 중에 불태워졌습니다. 사본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폭동이 가라앉자 알레포의 유대인들이 사본을 미리 숨겼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1958년 이스라엘 대통령 이즈학 벤즈비(Izhak Ben-Zvi)와 다양한 랍비 지도자들이 알레포 공동체를 설득하여 사본을 세탁기에 숨겨져 터키로 밀반입한 후 그곳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겨왔다.

사본은 예루살렘의 Ben-Zvi 연구소에 맡겨졌고, Rishon Le-Zion(세파르딕 최고 랍비)을 포함한 이사회가 이를 관리하도록 임명되었다.

알레포 사본은 불행하게도 예루살렘에 도착한 사본은 더 이상 완전하지 않았다. 시작과 끝, 중간에서 사라져 294잎만이 살아남았다. 물리적 상태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대대적인 보수가 필요했고, 이 작업은 약 6년에 걸쳐 이스라엘 박물관 연구실에서 이루어졌다.

알레포 사본, 양피지 양면에 필사, 33cm x 26.5cm

잉크의 재료는 쓸게즙과 검정 그을음에 황산철을 섞은 성분이라고 한다.

 

연구 결과에 의하면 사본은 불에 탄 흔적이 없다고 한다. 이후 역대기의 한 구절과 탈출기의 작은 조각이 뉴욕의 유대인으로부터 되돌려 받았다.

오늘날 알레포 사본은 1976년 사진 본이 일반에게 공개되었고, 오늘날은 인터넷상에서 자유롭게 알레포 사본을 만나볼 수 있다. (www.aleppocodex.org)

오늘날 히브리어 성경의 많은 현대 인쇄판은 알레포 사본에 기초하여 편집되고 있다. 바르 일란 대학교 판과 2000년에 히브리 대학교에서 발간한 예루살렘의 왕관이라는 히브리 성경이 대표적이다.

 

성경의 전당은 약 4(1961-64)의 공사를 거쳐 1965년 봄에 이스라엘의 대통령과 주요 외교 사절들, 그리고 주요 학자들이 참여한 가운데 두루마리 구매에 기여한 D. SamuelJeane H. Gottesman을 기리며 장엄하게 봉헌되었다.

그 후 2003년에서 2004년 사이에 건축가 나훔 멜처(Nahum Meltzer)의 지휘 아래 성경의 전당건물에 대대적인 보수작업을 하였고, 그동안 전시되던 제2차 유대 항쟁기의 바르 코크바 시대의 유물들은 철거되고 대신 히브리어 성경의 가장 중요한 중세 텍스트인 유랑하는 성경 : 알레포 사본’(A Wondering Bible: The Aleppo Codex)이 추가되어 성경 텍스트가 두루마리에서 필사본으로 진화한 역사를 보여주게 되었다.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요한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