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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기도 성당 가톨릭 기도문이 개신교 기도문으로 뒤바뀐 것에 대하여

테오필로 2009. 9. 11. 00:59

 

 

'주님의 기도 성당' 가톨릭 기도문이

개신교 기도문으로 뒤바뀐 것에 대하여

 

게임에는 룰(규칙)이 있고 장사에도 상도의가 있습니다. 하물며 영혼들의 구원을 다루는 종교에는 더할 나위 없는 윤리와 규범들이 필요하리라 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성지 예루살렘 올리브 동산에는 ‘주님의 기도 성당’이 있습니다. 이 성당은 프랑스 정부 소유이고 카르멜 수녀회(봉쇄 수녀회)중 개혁 그룹에 속하는 맨발의 카르멜 수녀회에 위탁되어 있습니다.

 

1965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참석하시고 귀국길에 성지 이스라엘을 순례하였던 부산교구 초대 교구장이었던 최재선 요한 주교님이 주님의 기도 성당에 들렀을 때 여러 나라 말로 된 주님의 기도문이 있었는데 한글로 된 기도문이 없는 것을 보시고 귀국하신 후 바로 우리말 주님의 기도문을 기증하였습니다. 그 후 성지순례 중에 주님의 기도 성당을 방문하는 우리 순례자들에게 큰 기쁨을 주었을 것입니다.

 

부산교구 최재선 요한 주교님이 봉헌한 우리말 주님의 기도

 

그런데 지난 2008년 12월 6일, 순례 가이드로부터 한통의 확인 전화를 받았습니다. 새로운 주님의 기도문이 붙어 있는데 우리 가톨릭 기도문이 아닌 것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확인 해 보니 가톨릭 주님의 기도문이 붙어 있던 바로 그 자리에 개신교용 주님의 기도문이 들어서 있었습니다.

 

 

며칠 후 주님의 기도 성당 카르멜 수녀원 원장과 담당자를 만났는데 수녀원측에서는 가톨릭 주님의 기도문이 마모되어 교체가 필요한 시기에 개신교 목사가 요청을 하였고 또 교회일치 차원에서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기에 개신교 주님의 기도문을 붙였다고 해명을 하였습니다.

참고로 봉쇄 수도원은 세상 속에서 세상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활동 수도회’와 달리 말 그대로 지정된 한 장소에서 초세기 은수자들이 광야에 나가 홀로 살았듯이 세상과 단절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굳이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세상물정 모르는(?) 순박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튼 위의 사진에서 확인되었듯이 가톨릭 주님의 기도문은 교체를 필요로 할 정도로 파손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도자기처럼 타일 위에 글을 써서 구워낸 것이기 때문에 세월이 흐른다고 마모된다든지 보수가 필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이번 스캔들의 목사님은 교회일치를 받아들이지 않는 보수 교단 출신이라고 들었습니다만...잘못 되었다고 느꼈을 때 바로 시정할 수 있는 겸손한 용기도 목회자에게 기대되는 중요한 덕목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모종의 거래가 있었을 경우에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튼 카르멜 수녀원과 어느 목사님의 합작에 의해서 가톨릭 주님의 기도문이 짓밟히는 수모가 카르멜 수녀회 안에서 비록 분별력 없는 수녀에 의해서 일지라도, 수도자에 의해서 저질러졌다는 것은 카르멜회의 수치이기도 할 것입니다. 더구나 카르멜회의 영성이 싹튼 이스라엘 안에서 말입니다.

 

이후 콱 막힌 수녀원의 원장과 담당 수녀와의 만남 후 바로 부산교구에 사실을 알렸고, 부산교구에서는 공식적으로 주님의 기도 성당과 관련된 기관에 원상 복구를 바라는 공문을 발송 했습니다. 해당 기관은 예루살렘 총대주교(Fouad Twal, Patriarch of Jerusalem), 작은 형제회 성지관구장(Pizzaballa Pierbattista, Custody of HolyLand), 카르멜회 총장, 주님의 기도 성당을 관할하는 이스라엘 주재 프랑스 대사관과 해당 카르멜 수녀원(Sr. Marie Thérèse와 담당 Sr. Elsbeth)입니다.

 

이 후 이스라엘과 가자지구와의 전쟁으로 직접적인 관할권을 가진 예루살렘 총대주교로부터 공식적인 답변은 시일이 조금 지난 2월 9일자로 있었고, 원래대로 복구 될 것이라는 답변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 세월이 흘러 9월 중순으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원래대로 복구되기를 희망하며 기다렸지만 개선의 여지가 보이지 않아 이러한 원인을 제공한 당사자들이 직접 나서서 결자해지하기를 바라며 치부를 드러내게 되었습니다.

 

개신교 목사와 주님의 기도문 수녀원 그리고 관리감독의 권한과 책임을 가진 사람들!

당사자들은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이야기 하며 상대방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싶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책임 소재를 따지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책임을 진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법 규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살기 좋은 세상을 만드는 데는 법의 규정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때때로 돈과 권력은 법의 규정 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도 아무런 죄 없이 십자가형에 처해져야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책임’을 진다는 것으로 비록 강제 규범은 아니지만 ‘양심’의 목소리에 호소하는 윤리 규범이 있습니다. 특별히 종교는 이 윤리 규범위에 서 있습니다. 왜냐하면 ‘양심’은 세상의 모든 규정을 초월하는 하느님의 법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다름’은 하느님의 축복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리스도인을 자칭하면서‘다름’은 악이고 그 악은 제거되어야 된다는 신념을 가진 사람들도 참 많이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고 있습니다.

 

실제로 2000년 교회 선교 역사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기보다 선교라는 명목 하에 파괴와 억압이 자행되기도 하였습니다. 불행 중 다행히 가톨릭 교회는 2000년 대희년을 맞이하면서 지난 과거를 반성하고 참회하는 성찰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우리 가톨릭 교회는 아무리 결과가 ‘선’한 것일지라도 과정이 바르지 못하면 그것은 하느님의 뜻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아무리 선의를 위한 것일지라도 타인을 짓밟고 타인의 것을 말살하고 그 위에 서라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성지에까지 와서 선교를 핑계 삼아 남을 짓밟고 찬탈하는 행위를 자행한 목사님께서는 일말의 양심이라도 가지고 있다면 처음 그대로 돌려놓기를 바랍니다. ‘아버지의 뜻이 그대로 이루어지라!’고 기도 하는 바로 그 자리가 목사님 당신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장소가 되지 않기를!

 

   

사랑의 행위는 감추려 해도 사랑의 향기가 되어 더욱 널리 퍼져 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늘나라에 영원한 상급을 쌓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악인의 행위도 잊혀지지 않고 사람들에게 영원히 기억되게 되어 있습니다.

 

최재선 요한 주교님께서 봉헌하셨던 한글판 주님의 기도문은 비록 세월을 간직한 낡은 기도문일지라도 세상을 향해 교회 문을 활짝 열면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염원을 담아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기도하였던 의미 있는 기도문이었습니다.

 

남의 것을 짓밟고, 남의 것을 파괴하면서 예수님의 사랑을 전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부디 예수님의 복음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다시 읽어 보시기를 권합니다. 그리고 일말의 양심의 가책을 느끼신다면 책임을 질 수 있는 용기를 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