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래아

타보르 산 - 주님께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시다.

테오필로 2009. 12. 24. 22:04

 

타보르 산

가톨릭 새 성경에 따라 '타볼산'은 '타보르 산'으로 표기 합니다.

 

타보르 산(Mount Tabor, 히- הַר תָּבוֹר)은 아풀라(Afula)에서 약 10km 떨어진 이즈르엘 북동쪽 평원 끝부분에 섬처럼 홀로 우뚝 솟아 있는 해발 588m의 산이다. 갈릴래아 호수 남서쪽에 위치해 있으며 갈릴래아 호수 서쪽에서 17km 떨어져 있다. 산의 정상은 대략 1200m x 400m나 되는 넓은 무대처럼 평평한 모습을 하고 있다. 타보르 산은 갈릴래아 주변에 있는 산들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산으로 둥근 지붕 모양을 하고 있다.

 

타보르 산에 정상 요새 성벽과 도면 : 왼쪽 화살표는 타보르 산 아래 마을로 이어진 도로이며 1.바람의 문  2.하산 경당  3.그리스 정교회 엘리야 성당  4.프란치스코회 수도원과 순례자 숙소/몬도 엑스 공동체  5.비잔틴 시대와 십자군 시대의 유적지(베네딕도회 수도원)  6. 거룩한 변모 대성전

 

 

 

 

 

 

산 아래에는 두 개의 아랍 마을이 있는데 북동쪽에는 쉬브리-움(Shibli-Umm)과 서쪽으로는 다부리야(Daburiyya)가 위치해 있다. 쉬브리-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1948년 아랍-이스라엘 전쟁이 일어났을 때 이스라엘 군을 도와 싸운 베두인 출신 사람들이다. 1948년 골라니 여단(Golani Brigade)이 타보르 산을 점령했을 때 다른 부족들은 모두 시리아와 요르단으로 도망쳐갔지만 쉬브리-움 부족은 그대로 남아 이스라엘 군을 도왔고 전쟁이 끝난 후 이스라엘 정부는 타보르 산 아래에 이들이 정착할 수 있도록 마을을 만들어 주었다.

쉬브리-움 베두인 마을 

 

 

타보르 산에 오르기 위해서 순례자들은 쉬브리-움에서 작은 승합차로 갈아타야만 한다. 타보르 산으로 오르는 도로는 폭이 좁고 굴곡이 심해서 대형 차량은 올라갈 수 없다. 이 길은 건축가 바를루찌가 이태리에서 가져온 건축 재료들을 산 꼭대기로 옮기기 위해 만들어진 길이다. 일반 승용차는 산 정상까지 올라갈 수 있지만 버스가 올라가기엔 길이 너무 좁고 굴곡이 심하다. 산 정상에 오르면 13세기 무슬림들에 의해 지어진 육중한 성곽의 흔적인 “바람의 문”을 통과하여 곧바로 들어가면 타보르 산 수도원 근처의 광장에 이른다. 주차장에서 타보르 산 정상 수도원 입구까지는 대략 3.2km이다. 여유가 있다면 굽은 길을 따라 걸어 보는 것도 좋은 추억일 것이다.

 

사진 왼쪽이 다부리야(Daburiyya) 마을이며, 타볼산을 중심으로 그 위쪽은 쉬브리-움 마을이다.(오른쪽 능선 아래를 따라)

 

 

 

 

정상에 오르면 확 트인 이즈르엘 평원의 화려한 경관을 볼 수 있다. 멀리 남동쪽으로는 사울 왕의 비극적인 최후를 간직한 길보아산이 보이며, 아풀라로 향하는 도로 왼쪽 ‘모레산’(Har More) 자락에는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신 기적을 베푼 ‘나인’(루카 7,11-17) 마을이 있으며 아풀라 너머로 이즈르엘 평원과 카르멜 산 능선이 만나는 곳에는 므기또 언덕(2열왕 23,29 등)이 있고 멀리 카르멜 산 능선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서북쪽으로는 나자렛 언덕 능선이 바라보인다.

  

 

나자렛 쪽에서 바라본 타볼산...바라다 보이는 쪽에 정상으로 올라가는 차도가 나 있다. 

 

 

 

 

 

 

 

 

 

 

 

사진 중간에 보이는 마을은 아랍 마을(에인 마힐)이고 나자렛은 사진 왼쪽 끝부분 능선 아래에 있다. 

 

 

 

 

 

 

 

 

 

 

 

 

 

 

 

 

 

 

 

 

 

타보르 산은 높은 산과 주위 평야지대로 이루어진 지형때문에 행글라이더들이 선호하는 곳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구석기 시대부터 구약시대 까지.

 

타보르 산은 오트만 터기 제국이 통치하기 이전에는 이스라엘의 전형적인 우거진 숲이었지만 터키 제국 시기 동안 대부분의 나무들은 잘려 수탈되었다. 오늘날의 타보르 산 모습은 이스라엘 건국 후 유대인 기금에 의해서 가꾸어진 것으로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 가고 있다. 소나무와 참나무 등 풍부한 식물군과 동물군으로 뒤덮여진 타보르 산은 태고적부터 거룩한 산으로 알려져 왔다.

 

타보르 산 동쪽의 경사진 면에서 1925년에 고고학 발굴 작업이 수행되어 초기 구석기시대와 구석기 시대 중기(8만-4만 년 전)의 도구들이 발견 되었다. 안정된 주거 환경을 이룬 것은 구석기 이후 즉 중석기 시대(3만 5천년-1만5천년)이다.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처음 도착하기 이전에 산 정상에는 이미 가나안 사람들의 성소가 위치해 있었다. 이 성소의 흔적은 변모 대성전 중앙 제대 아래에 있는 경당의 바닥에서 볼 수 있도록 발굴해 놓았다. 현재 대성당 중앙 제대 아래 아름답게 모자이크화 되어 있는 경당은 비잔틴 시대와 십자군 시대에 지어진 기념 경당이 있던 자리인데 한쪽에 가나안 시대에 제사를 지내던 흔적이 남아 있는데 유리 바닥을 통해서 들여다 볼 수 있다. 대성전에 들어서면 바로 바닥에 격자모양의 쇠창살을 볼 수 있는데 이 계단을 통해서 고고학 발굴을 해 놓은 중앙 제대 아래의 발굴 장소로 들어갈 수 있다.

 

타보르 산이 성경에서 처음 언급되는 것은 여호수아에 의해 열두 지파에게 땅이 분배될 때이며 즈불룬 지파(여호 19,12), 이사카르 지파(여호 19,22) 그리고 납탈리 지파(여호 19,34)의 경계였다.

그리고 판관기에 언급되는데 ‘판관 드보라와 그의 장수 바락’(판관 4,1-16 참조)의 이야기 이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지르자 주님께서는 하초르를 다스리는 가나안 임금 야빈의 손에 스무 해 동안 이스라엘을 억압하게 하였다. 그러나 여예언자 드보라가 이스라엘의 판관으로 있을 때 ‘바락’으로 하여금 야빈의 장수 시스라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장면이다.

판관 4,6ㄷ-7 “자, 납탈리의 자손들과 즈불룬의 자손들 가운데에서 만 명을 데리고 타보르 산으로 행군하여라. 그러면 내가 야빈의 군대 장수 시스라와 그의 병거대와 그의 무리를 키손천으로 끌어내어 네 손에 넘겨주겠다.”

 

 

예레미야는 이집트 땅을 치려고 하는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의 위용을 산들 중에서 타보르 산과 같다고 비유하고 있고 바닷가에서는 카르멜과 같은 자라고 언급하고 있다.

예레 46,18 내가 살아 있는 한 ─ 그 이름 만군의 주님이신 임금님의 말씀이다. ─ 산들 가운데에서는 타보르 같고 바닷가에서는 카르멜 같은 자가 반드시 쳐들어온다.

 

그 외 타보르의 참나무(1사무 10,3), 타보르에 펼친 그물(호세 5,1)과 시편에서는 타보르 산이 헤르몬산과 견주어 하느님의 이름을 환호하는 내용으로 언급된다.

시편 89,13 북녘과 남녘을 당신께서 만드시니 타보르와 헤르몬이 당신 이름에 환호합니다.

 

신약시대에서 비잔틴 시대까지

구약성경에서는 여러 곳에서 타보르 산이 언급되고 있지만 신약성경에서는 어느 곳에서도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사도 앞에서 거룩한 변모를 하셨는데 당신의 거룩한 신성으로 화려하게 빛나는 옷을 입고 모세와 엘리야 예언자와 이야기를 나누셨다. 마태오 복음과 마르코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산의 이름을 말하지 않고 다만 ‘높은 산’(마태 17,1 ; 마르 9,2)이라고 표현하고 있고 루카복음에서는 ‘산’(루카 9,28)이라고 간단하게 이야기 하고 있다.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시다 (마르 9,2-10 ; 루카 9,28-36)

마태 17,1-9 엿새 뒤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는데,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 그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베드로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었다. 그리고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이 소리를 들은 제자들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 채 몹시 두려워하였다. 예수님께서 다가오시어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그들이 눈을 들어 보니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하고 명령하셨다.

 

 

그러나 사도시대에 거슬러 올라가는 오래된 전승에 의하면 오리게네스(Origenes, 185-253, 알렉산드리아의 성서학자이며 주석가. 교부. 알레고리 해석의 대가. 하늘나라 때문에 고자가 된 사람들에 관한 말-마태 19,12-을 문자적으로 이해하여 스스로 고자가 됨) ‘타보르 산이 예수님께서 거룩한 변모를 하신 산으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공경하는 장소’라고 언급하고 있다.

오리게네스와 체사리아의 에우세비오(Eusebius Caesariensis, 260?~339. 최초의 그리스도 교회사가. 주교)는 시편 88,13을 주해하면서 언급 하였고, 예루살렘의 치릴루스 주교(Cyrillus Hierosolymitanus, 315?∼397. 성인.주교.교회학자)는 그의 대표작인 '교리문답서'에서  “주님께서는 타보르 산에서 거룩하게 변모 하셨을 때 모세와 엘리야가 주님 곁에 나타났다”고 전하고 있다.

 

첫 번째 유다 항쟁 동안 타보르 산은 갈릴래아의 유대인 저항군의 교두보였다. 제1차 유다 독립항쟁(66-70년) 때 요세푸스 플라비우스(Josephus Flavius, 37/38 예루살렘-100경 로마. 예루살렘의 귀족 제사장 가문에서 태어난 유대인 제사장·학자·역사가)는 갈릴래아 군대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로마군이 제일 먼저 갈릴래아를 공격할 것임을 예견하고 타보르 산 정상을 비롯하여 갈릴래아 주변 19개 지역에 성벽을 구축하였고 갈릴래아 지역 혁명군들을 배치하였다.

그러나 훗날 로마의 황제가 된 베스파시아누스(Vespasianus, 9-79, 69부터 79까지 황제가 되어 통치) 총사령관은 그들보다 더 훌륭한 책략가였다. 유다 항쟁군들이 산에서 내려가 항복을 하는 것처럼 위장하여 로마군을 치려는 책략에 속지 않고 오히려 그들에게 쫓기는 것처럼 이즈르엘 평원으로 유인 하여 유다 항쟁군 대부분을 진압하였다. 그들 일부는 다시 타보르 산으로 피신해 갔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파괴 되었다.

후에 결사대의 거점이 된 요타파타로 피신한 요세푸스는 요새를 지키려고 애썼지만 47일 만에 함락되자 40명의 결사대원은 항복하기보다 자결하기로 결정하였다. 유대 율법에 의하여 자살할 수 없었으므로 제비를 뽑아 순서대로 곁에 있는 동료를 죽이기로 하였는데 요세푸스는 마지막으로 두 사람이 남았을 때 상대방을 설득하여 로마군에 항복했다. 갈릴래아는 67년에 로마의 베스파시아누스 장군 수중에 들어가게 된다. 포로가 된 요세푸스는 베스파시아누스가 곧 황제가 될거라는 예언을 하였고,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가 된 후 자유의 몸이 되어 역사 편찬 작업을 시작한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를 기념하는 첫 번째 건물은 비잔틴 시대인 4세기 말경에 세워졌다. 이태리의 한 익명의 순례자는 570년에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에게 봉헌된 3개의 경당이 타보르 산 정상에 세워져 있다고 전하고 있다. 실지로 670년 경 성지순례를 한 아르쿨포(Arculfo) 주교는 많은 수의 수도자들이 경당에서 전례를 거행하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이 성당은 670년 이후 아랍 군대에 의해 파괴 되었다.

 

아랍-십자군-아랍 시대

아랍-십자군-아랍이 지배하는 긴 세월 동안 타보르 산은 그의 지정학적인 위치 때문에 번갈아가며 정복되고 요새화 되고 파괴되는 곳이었다.

1099년 십자군들은 거대한 대성당과 부속 건물로 베네딕도 수도원을 건설하였다. 갈릴래아의 왕자인 탄크레디(Tancredi)는 막대한 수입을 제공하였고 거룩한 성소를 수도자들에게 맡겼다. 문헌 자료에 의하면 타보르 산에 나자렛의 보좌주교가 살았다고 전한다. 타보르 산은 순례의 목적지이기도 했지만 번창하는 그리스도 문화와 영성의 중심지가 되었다. 성전과 수도원은 요새화된 성곽으로 보호 되었다.

1113년 아랍군은 타보르 산 정상을 기습 공격하였다.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은 모두 학살당하였고 성전과 수도원은 파괴되었다. 그 후 수도자들은 성전과 수도원을 재건하기 위하여 되돌아왔다. 1183년 살라딘(Saladin, 1137/1138-1193, 이집트·시리아·예멘과 팔레스티나에 강력한 왕국을 세운 쿠르디스탄 술탄)의 지휘 하에 공격을 받았지만 파괴에서 모면하였고, 오히려 근처에 있는 그리스 정교회의 성 엘리아 성당과 수도원은 보호받지 못하고 파괴 되었다.

그러나 1187년 십자군들이 티베리아 근처 ‘하틴의 뿔’(The Horns of Hattin) 전투에서 대패를 당한 후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은 위험 속에 노출되었고 결국은 타보르 산을 포기하고 떠나야만 했다.

 

1213년 다마스쿠스(Damasco) 술탄의 아들 말릭 엘-무아잠(Malik 디-Muàzzam)은 산 정상을 요새화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들은 먼저 그리스도교의 잔여물인 성전과 수도원을 말끔히 없애고 산 정상에 서쪽으로 향해서 길이 580m, 남북으로 너비 250m나 되는 육중한 요새를 건설하였다. 두 개의 성문이 있었는데 산 정상을 올라서면서 만나는 ‘바람의 문’이 그 중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대성당 뒤쪽에 도랑만 남아있다. 동쪽에 있는 성문은 깊은 도랑을 판 후 물이 채워진 도랑 위에 닫고 열 수 있는 다리를 만들었고, 서쪽에는 20 × 15m나 되는 거대한 망루가 있는 성문을 만들었다. 이 성문은 지금도 타보르 산 정상을 거의 올라서서 타보르 산 성당으로 들어가는 입구로 ‘바람의 문’(Gate of the Wind, 아: bab al-Hawa)이라고 부른다.

 

 

 

 

 

 

 

 

대성전으로 들어가는 길...도로 끝에 이르면 수도원 마당이 나온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의 장소에 요새를 건설하는 것은 유럽 그리스도교 지배자들을 격노하게 하였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 의한 제5차 십자군의 주요 목적 중 하나는 타보르 산을 수복하는 것이었다. 인노첸시오 3세는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사라센인들이(무슬림들)이 타보르 산 위 대성전 터 위에 요새를 건설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치욕”이라고 표현하면서 성전수복을 촉구하고 있다. 이에 헝가리아의 왕 안드레아 2세는 1217년 11월 십자군을 파견하여 타보르 산을 포위하고 12월에 수많은 사다리를 이용하여 공격하였다. 그렇지만 타보르 산을 수복하지는 못하였다. 무슬림들은 전투에서 승리하였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 그토록 소중한 성지 위에 요새를 짓고 차지한다는 것은 마찰과 자극의 요인이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한 계기가 되어 결국 요새를 해체하기로 결정하였다. 10년간의 휴전(1229-1239) 후 독일의 페데리코 2세(Federico II)는 협상 끝에 그리스도인들이 다시 타보르 산을 소유할 수 있도록 협상을 이끌어내었다.

 

타보르 산에 다시 그리스도인들이 돌아왔지만 파괴된 엄청난 잔여물들로 뒤덮여진 십자군들의 성역을 복구하기란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작은 기도소를 건설하였지만 이것도 짧은 기간 동안만 유지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1263년 중동지역을 다시 장악한 맘룩 왕조(Mamluk dynasty)의 바이바르스 1세(Baybars I, 1223-1277)가 그리스도인들이 지은 모든 성전을 파괴할 것을 명령하였기 때문이다. 그 후 타보르 산 위에는 거의 4세기 동안 건물이 파괴된 잔여물들만이 뒤덮여 있게 되었고 몇몇 극소수의 용감한 순례자들만이 찾는 곳이 되었다.

 

타보르 산 위의 프란치스칸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자렛과 예루살렘의 프란치스칸들은 가능한 한 주님의 거룩한 변모의 산에 오르곤 하였다. 그러나 타보르 산에서 전례를 거행할 수 있는 가능성은 전적으로 산 아래에 살고 있는 ‘다부리아’(Daburyah) 무슬림 주민들에게 달려 있었다. 특별히 통치자의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반감의 정도에 따라 크게 달랐지만 허락을 받았을 경우에도 프란치스칸들은 호의적으로 통행세를 지불해야 했다.

1631년 이슬람의 통치자(Fakhr ed-Din)는 이태리 토스카나 지방의 시돈 영사인 프란치스코의 배려와 함께 성지관구장의 탄원을 받아들여 타보르 산 정상을 프란치스칸들에게 증여하였다.

이러한 증여에도 불구하고 지역 무슬림 주민들의 적대감은 지속 되었다. 1634년 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베르니에로(P.Verniero)의 연대기에 “프란치스칸들은 타보르 산에 거주하고 또 순례자들이 쉬어갈 작은 숙소를 짓기를 희망 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지역 무슬림 주민들이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적대감을 표출했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1644년 지역 주민들은 프란치스칸들과 순례자들이 타보르 산 위에서 전례를 거행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타보르 산의 입구를 막고 차단하기까지 하였다.

서서히 적대감은 완화되었고 프란치스칸들은 그들의 타보르 산 정상에서 자유롭게 순례자들과 함께 다양한 전례를 거행할 수 있는 권리를 행사할 수 있었다. 

 

1854년 성전이 건축되기 전에 산 정상의 파괴된 잔해물 위에서 고고학 발굴 작업이 시작되었다. 그리스 정교회 지역과 프란치스칸 지역에서 발굴 작업이 진행 되었는데 그리스 정교회 지역에서는 4-5세기의 경당을 발굴하였다.

1858년 8월 6일 예수님 변모 대축일을 계기로 하여 첫 번째 프란치스칸 공동체를 이룰 수 있도록 경당과 부속 건물을 짓기로 결정을 했지만 지역 무슬림들의 반대 투쟁 때문에 그 후 오랜 세월동안 소유권을 행사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더구나 전염병이 돌아 공사는 중단되었고 그 후 더 이상 재개되지 못하였다.

1875년 파괴된 무슬림들의 요새를 비롯하여 광범위한 지역에서 발굴 작업이 재개되었고 베네딕도 수도원의 잔해와 십자군의 대성전, 무슬림들이 만든 동쪽 성문 등이 확인되었다.

 

꼬불꼬불한 산길을 올라오면 ‘바람의 문’이 우뚝 솟아 있다. 바람의 문을 들어서면 양옆으로 잘 가꾸어진 나무들 사이를 통과해서 쭉 들어가면 타보르 산 정상 주차장에 이르고, 철문을 들어서면 넓은 수도원 마당이 나온다.

 

 

 

 

 

 

 

 

타볼산 수도원에서 연피정중  수도원 마당에서 산책하며 기도하는 형제들 모습

 

 

 

 

대성전을 향하여 오른쪽엔 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타보르 산 수도원과 마약 중독자 재활 공동체인 ‘몬도 엑스 공동체’가 있었으나, 코로나 19가 시작되면서 공동체는 떠나갔다. 곧 수녀님들을 모실 예정이다.
다른 좋은 숙소들과 견줄 수는 없겠지만 타보르 산 정상에서 하루 묵으며 주님의 거룩한 변모를 묵상하는 것은 좋은 추억이 될 것이다.

 

 

 

 

 

 

 

 

타볼산 수도원 식당에서 식사하는 순례자들 

 

 

 

수도원 마당을 지나 작은 철문을 들어서면 양쪽으로 십자군 시대에 지어졌다가 파괴된 베네딕도회 수도원의 잔해들을 볼 수 있다.

 

 

 

 

 

 

 

 

베네딕도회 수도원의 흔적들 

 

 

 

 

 

 

 

 

 

 

 

 

 

 

 

 

 

 

 

 

 

이즈르엘 평야에서도 타보르 산 위에 우뚝 서 있는 대성전을 볼 수 있는데 현재의 대성전은 1919년 10월에 짓기 시작하여 1924년 비오 11세 교황의 사절로 온 지오르지(Giorgi) 추기경에 의하여 축성되었다. 대성당은 바를루찌(Barluzzi)에 의해 완공되었다.

 

 

대성전 입구 위쪽에 씌여진 마태오 복음에 의한 거룩한 변모  

 

 

 

 

 

 

 

 

 

 

 

 

 

 

 

동쪽편의 대성전 모습 

 

 

 

 

 

 

 

 

 

 

성당 입구 정면 양쪽은 두 개의 종탑이 우뚝 솟아 있고 그 아래에는 모세와 엘리야에게 봉헌한 경당이 있는데 이곳은 비잔틴 시대에 모세와 엘리야에게 봉헌한 경당이 있었던 바로 그 자리이다.

 

성당 정문을 들어서면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대성당 정면 중앙에 예수님께서 거룩한 변모를 하시고 양 옆에 모세와 엘리야가 구름을 타고 예수님과 말씀을 나누는 것을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보고서 깜짝 놀라는 화려하게 수놓은 모자이크가 들어온다.

 

 

 

 

대성당은 아치형으로 만든 두 줄의 기둥으로 삼등분 되어 있는데 중앙제대를 바라보고 왼쪽은 성모님께 봉헌한 제대가 있고 오른쪽은 프란치스코 성인에게 봉헌한 제대가 있다. 중앙 제대 바로 아래에는 아름답게 꾸며진 아담한 경당이 있다.

 

 

 

 

 

 

 

대성당 중앙에서 12계단을 내려가면 중앙제대 바로 아래에 동굴처럼 되어 있는 경당이 나오는데 이곳은 비잔틴 시대에 3번째 경당이 있었던 곳이며 이후 십자군 시대의 경당이 지어졌지만 무슬림들에 의해 파괴된 곳이다. 경당의 바닥에는 십자군 시대의 경당이 있었던 흔적들을 볼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으며 제대는 십자군 시대의 성당 잔해물들로 만들었다.

 

 

 

 

 

 

중앙 제대 아래에 있는 이 경당에서 무엇보다도 눈길을 끄는 것은 제대 위 원통형 천장에 만들어 놓은 모자이크이다. 대성당 중앙 제대 위쪽에는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의 신비를 모자이크화 하였다면 이 작은 경당에는 복음서에 나타나 있는 예수님 생애에서 주요 신비의 모습을 네 가지로 요약하여 표현하고 있다.

 

제대를 중심으로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중앙에는 예수님과 그리고 좌우로 모세와 엘리야를 천사의 모습으로 표현하여 탄생에서부터 부활까지의 신비를 거룩한 변모의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의 신비를 천사의 모습으로 표현하면서 변모를 목격하고 있는 세 제자를 모자이크에 넣지 않은것은 지금 이 자리에 함께 하고 있는 우리들이 하느님의 신비를 목격하고 있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성탄의 신비 :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어 오시는 아기 예수의 성탄의 신비를 표현하고 있다.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 예수님으로 표현하고 있다.

성체성사의 신비 :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위하여 당신 몸을 내어주시는 성체성사의 신비를 표현하고 있다. 중앙에 있는 예수님께서 빵과 포도주를 들고 계신다.

   

 

 

 

 

 

 

제대 뒤편은 색유리와 창살로 아름답게 꾸며져 있고 공작새 두 마리가 서로 마주보고 있는 모습이다. 성전 중앙 제대는 구원의 방향인 동쪽을 향해 나 있으며(에제 47,1) 아침 햇살이 떠오르면 빛이신 그리스도께서 불멸을 상징하는 공작새 너머로 구원의 신비를 표현하고 있는 모자이크를 눈부시게 비추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러므로 초막을 지어 주님과 함께 머무르고 싶어 했던 베드로 사도의 마음으로 타보르 산 수도원 숙소에서 머물고 이른 아침 이 경당에 조용히 앉아 떠오르는 아침 햇살을 맞이할 수 있다면 거룩하게 변모하시는 주님의 곁에 있는 느낌을 더욱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제대 오른쪽에는, 구원의 신비 : 하느님께서 우리들의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 희생양이 되신 수난과 죽음의 신비를 세 천사들 앞에 피를 흘리고 죽어있는 어린양으로 표현하고 있다.

부활의 신비 : 예수님께서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써 하느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승리하심을 관을 딛고 선 예수님을 통해서 표현하고 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거룩하게 변모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뵐 수 없지만 주님께서 우리에게 남겨주신 거룩한 성사를 통해서 주님의 집에서 영원히 함께 머물고 있음을 네 개의 모자이크는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모세 경당

성당 입구를 들어서면 바로 좌우로 모세의 경당과 엘리야 경당이 있다.

모세 경당의 제대 위에는 모세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들을 프레스코화로 표현하고 있다. 모세가 하느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은 시나이 산(탈출 20장)이 뒤에 보이고,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당신을 보여주신 불타는 떨기(탈출 3,1-6), 그리고 왼쪽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마실 물이 없다고 불평하며 주님을 시험하였다. 그러자 모세가 지팡이로 바위를 쳐서 물이 터져 나오게 한 ‘마싸와 므리바의 물’(탈출 17,1-7)을 상기시켜 주고 있다.

 

 

 

 

  

엘리야 경당

엘리야의 경당도 비잔틴 시대에 있었던 경당 자리위에 지은 것으로 경당 바닥과 벽면에서는 비잔틴 시대와 십자군 시대의 흔적들을 볼 수 있다. 제대 위쪽에 있는 프레스코화에는 엘리야가 카르멜 산에서 바알 예언자들과 대결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1열왕 18,20-40참조). 엘리야는 홀로 바알의 예언자 사백오십 명과 대결을 하는데 황소 한 마리씩 각각 잡아 기도 하여 불로 대답하는 신이 있으면 바로 그분이 하느님이 되는 것이었다. 바알의 사제들은 한낮이 지나도록 아무런 대답이 없어 번제물이 그냥 남아 있다. 반면 엘리야는 야곱의 자손들 지파 수대로 열두 개의 돌을 가져다가 주님의 이름으로 제단을 쌓고 그 둘레에는 깊은 도랑을 팠다. 엘리야는 번제물 위에 물을 네 항아리에 가득 채워 세 번씩 부어 도랑에 물이 넘쳐흐를 정도로 적시고 나서 하느님께 기도하자마자 주님의 불길이 내려와 번제물과 장작을 사르는 장면이다.

 

 

 

 

  

하산(下山) 경당

거룩한 변모 대성당에서 ‘바람의 문’을 향하여 내리막길에 들어서기 전에 바람의 문 조금 못미처 왼쪽으로 프란치스칸 소유의 작은 경당이 하나 있다. 이것은 ‘하산(라-discendentivus) 경당’이라고 부르는데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실 때에 주님의 거룩한 변모를 목격한 제자들에게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분부를 기념하는 경당이다.

 

마르 9,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그리스 정교회 성당

타보르 산 정상에 이르러 왼쪽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가면 1911년 엘리야 성인에게 봉헌한 그리스 정교회의 성당과 수도원이 나온다. 가파르나움(공생활의 중심지)과 카파르 카나(혼인잔치의 첫 기적)에 있는 그리스 정교회 성당처럼 이곳의 성당도 붉은 둥근 지붕 모습을 하고 있다. 1183년 십자군들이 하틴의 뿔 전투에서 패한 후 살라딘은 타보르 산을 공격하였다. 이때 베네딕도회 수도원은 성곽 안에 있었기 때문에 정복할 수 없었지만 성곽 밖에 있었던 그리스 정교회의 수도원은 모두 파괴되고 수도자들은 학살되었다. 현재의 성당은 살라딘에 의해 파괴된 자리 위에 1862년에 다시 지어진것이다.

 

 

 

 

 

 

 

 

 

 

 

 

 

 

 

 

 

 

 

 

 

 

 

 

 

 

 

 

성당 근처에는 ‘멜키세덱의 동굴’이 있다. 전승에 의하면 살렘 임금 멜키체덱이 살았던 곳이라고 한다. 아브람은 조카 롯이 잡혀가자 다마스쿠스 북쪽에 있는 호바까지 쫓아가서 빼앗긴 모든 것을 되찾아 돌아올 때 살렘 임금 멜키체덱은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와 이곳에서 맞이하였다고 한다.(창세 14,17)

 

 

루가복음에 따르면 갈릴래아에서부터 시작된 예수님의 공생활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는 여정으로 그리고 있다. 따라서 교회는 예수님께서 수난 전에 십자가 죽음의 걸림돌을 제자들이 극복하도록 마음의 준비를 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거룩한 변모를 하셨다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수난시기인 사순 제2주일에는 예수의 거룩한 변모 사건 복음 구절을 묵상한다. 그리고 교회는 8월 6일을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로 정해서 기념하고 있다. 성지의 작은 형제들은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전날 나자렛 성모영보 대성전에서 타보르 산까지 도보순례를 하여 하룻밤을 타보르 산에서 머물고 그 다음날 아침 성지관구장이 주례하는 주님의 거룩한 변모 대축일 미사를 거행한다.

 

타보르 산은 또한 전통적으로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 사명을 부여한 곳이라고 전해지고 있다(마태 28,16-20).

 

마태 28,16-20 열한 제자는 갈릴래아로 떠나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산으로 갔다.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가 이르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주님, 저희가 여기서 지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마태17,4)